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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리 음악 소풍' 때문에 베토벤의 음반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이번 주말 예정인데, 실은 사회학자 김종엽 선생에게 '모짜르트 소풍'을 부탁하였으나 원고 사정으로 연기되고 내가 대신 맡은 것이다. 이 일도 원래는 음악평론가 강헌 선생의 몫이었으나 그는 지금 세브란스 중환자실에 있다. 

대책없이 떠맡고 나서 베토벤 음반을 정리하던 중인데, 아뿔싸,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7월 6일, 모친의 고향인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서 숙환으로 별세한 그는 역시 슬로베니아 출신인 아내의 묘지 옆에 지난 10일 안장됐다고 한다. 향년 74세. 

그리하여 몇 자 적는다. 

▲ 지난 7월 6일 사망한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
클라이버를 위하여 세 사람이 필요하다. 먼저 그의 대척점에 있던 카라얀이다. 20세기 후반의 클래식에 있어 '카이저'의 칭호를 받을 만한 카라얀의 생애는 확실히 은둔자 클라이버와 거리가 있다.

카라얀은 클래식이 20세기 전반기의 '실황 연주'에서 세련된 녹음과 '스타 마케팅'으로 옮겨가는 지점을 절묘하게 파악했으며 이를 그 누구보다 최상의 수준에서 활용했던 음악가였다. 그는 수십 대의 카메라를 동원해 자신의 지휘하는 장면을 녹화했으며 최첨단의 스튜디오에서 대중적인 레퍼토리를 수십차례 녹음했다. '클래식=카라얀'이라는 음반 마케팅의 공식을 그는 입증하였다. 

반면에 클라이버는 스튜디오 녹음 대신 연주회장의 라이브를 절대적으로 존중하였다. 그의 음반은 손을 꼽을 정도인데 그중에서도 대부분은 라이브를 녹음한 것이다. 감상자에게는 불과 대여섯 장만 구입해도 되는 뜻밖의 기쁨도 있다. 어쨌거나 그는 조금이라도 빈 틈이 보이면 녹음은 물론 실황 연주마저 취소했으며 음반 산업자와 언론의 관심을 즐기지 않았다. 

▲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명반들
그러나 이러한 차이만으로 클라이버와 카라얀을 대비할 수는 없다. 클라이버가 스튜디오 음반을 전혀 남기지 않은 것도 아니며 카라얀의 명성이 음반 마케팅으로 거저 얻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클라이버가 왜 한사코 스튜디오 녹음을 절제했으며 라이브 연주 또한 최상의 조건이 아니면 자주 회피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두 번째 인물, 그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는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아들은 물론 카라얀에 비해서도 음악사적인 비중이 결코 작지 않다. 다만 그는 멩겔베르크나 푸르트뱅글러처럼 스테레오가 아닌 모노 시대의 지휘자로 현재 들을 수 있는 그의 음반은 상태가 매우 열악하다. 

에리히 클라이버는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 '저주받은 예술가로서의 삶'을 물려주기 싫었던 것이다. 그의 전성기는 다름아닌 히틀러의 전성 시대. 모차르트 오페라에 있어 불멸의 유산을 남긴 에리히 클라이버는 그러나 히틀러 파시즘의 광풍이 몰아치고 예술가에 대한 탄압에 절정에 이른 1935년에 아르헨티나로 망명을 떠났다. 그때 다섯 살이었던 아들 '칼'의 이름을 아버지는 남미식으로 '카를로스'라고 바꿔버렸다. 파시즘에 대한 뼛 속 깊은 저항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차 대전 이후 독일로 돌아왔지만 그의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었다. 대신 카라얀의 시대가 열렸다. 푸르트뱅글러와 에리히 클라이버는 히틀러 파시즘 속에서도 나름대로 지켜온 '독일 음악의 유산'이 카라얀에게 이어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이 지점에서 세 번째 인물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등장한다. 독일 음악 유산의 위대한 상속자인 푸르트뱅글러는 히틀러 시대에 독일에 남았다는 이유로 무대에 서지 못했다. 나중에야 몇몇 기록과 증언에 의하여 복권되지만 그가 베를린 필에 다시 서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기술 발전에 따른 스튜디오 녹음이 서서히 대세를 확보해가는 시절에 푸르트뱅글러는 오로지 '라이브'을 고집하였으며 복권 후 몇 해 동안 베를린 필의 음악적 제사장으로 최후의 명연을 남겼다. 

그럼에도 세상의 운명은 카라얀 쪽으로 기울었다. 1933년에 나치에 입당했고 히틀러의 총애를 받으며 빈 국립오페라극장, 베를린 필 등을 독점하다시피 한 카라얀은 그러나 놀랍게도 47년에 해금되었으며 EMI의 명프로듀서 월터 레그를 만나 전성기를 열었다. 클래식이 '레코딩' 산업과 판촉 활동을 겸한 연주회로 재편될 것을 예견한 월터 레그는 레코딩 전문악단 필하모니아를 설립해 카라얀에게 맡겼고 이후 카라얀은 스튜디오 시대의 황제가 되었다. 

게다가 54년에 푸르트벵글러마저 죽고 말았다. 푸르트뱅글러는 한사코 '히틀러 군악대장'에게 독일 음악의 유산이 이어지는 것을 막고자 했고 에리히 클라이버도 카라얀과 대척에 섰으나 그마저도 56년에 사망하고 만다. 남은 사람은 브루노 발터였으나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콜럼비아 교향악단으로 명연을 남기고는 역시 노환을 이기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카라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1955년에 베를린 필에 입성한 카라얀은 이듬해 '종신' 예술감독직까지 맡아 독보적인 아성을 구축했다. 

그 무렵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취리히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후 아버지 몰래 뮌헨의 3류 극장에서 견습생으로 음악을 배웠다. 아버지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던 무렵에 지휘자로 데뷔한 그는 1974년 독일 바이로이트 음악제를 통해 뒤늦게야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다. 

그는 단 한번 슈투트가르트의 음악감독을 2년 쯤 맡은 것 말고는 평생 동안 상임이나 무슨 감독직을 맡지 않았다. 뮌헨, 빈, 류블랴냐 등의 교향악단과 연주를 했지만 전속은 맺지 않았다. 그는 다만 지휘자였고 음악가였다. 89년에 카라얀이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거론되었지만 정작 클라이버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세상 밖에 머물렀다. 연락이 두절되기 일쑤였으며 거처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의 명성에 비하여 사망한 지 보름 후에나 그 소식이 알려진 까닭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한 베토벤 5번 교향곡
'레코딩을 허락하는 것은 내겐 공포에 가까운 일이다’

클라이버의 말이다. 여기에는 몇가지 뜻이 숨어 있다. 일차적으로는 그의 음악적 취향을 보여준다. 어두컴컴한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 대신 카메라, 마이크, 음향 설비를 대상으로 연주하는 것을 그는 기피했다. 

어쩌면 카라얀을 무의식적으로 의식한 말일 수도 있다. 뛰어난 지휘자이면서도 동시에 정교한 연출자이자 20세기 음반산업의 마케팅 팀장이기도 했던 카라얀에 비하여 어쩌면 클라이버는 19세기에 형성된 서구 클래식의 마지막 정통파로 남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음악의 주술적 요소를 존숭했다는 점. '라이브'가 갖는 일회적인 엄숙성, 피날레가 끝나면 박수에 묻혀 영원 속으로 저장되는 '실황 연주'의 숙명에 대하여 클라이버는 고개를 숙였던 것이다. 

히틀러의 생일 전야제에 불려가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지휘해야만 했던 푸르트뱅글러가 일체의 스튜디오 녹음을 거절한 것처럼 클라이버는 적어도 베토벤에 있어서 '지금 이 순간'의 현장성과 일회성, 요컨대 그 순간에만 존재하고 영원히 소멸하고 마는, 그러나 단순히 '공기의 흔들림'으로 그치지 않고 부채꼴의 연주자와 말굽형의 관객들 사이의 한 정점에 서서, '영원 속으로 소멸'하는 음악적 제의를 집전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그는 맡았던 것이다. 

클라이버의 불가피한 선택은 틀림없이 음악 산업이라는 대세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음악적 가치와 명성은 높아졌으며 은둔할수록 세상은 더욱 그를 원했다. 관습적인 데뷔, 상투적인 레코딩, 상업성이 뻔히 보이는 연주회 등으로 오늘날 클래식 산업은 오히려 사양 산업이 되고 말았는데 그 화려한 패잔병들 틈에 끼지 않고 클라이버는 은둔과 사색의 만년을 선택했던 것이다. 

▲ 라이브 연주의 백미로 꼽히는 클라이버 지휘의 베토벤 4번 교향곡
몇 장의 음반만 남기고 그는 떠났다. 당연히 그가 남긴 것은 몇 장의 음반이 아니라 세속을 거절하고 '20세기의 마지막 예술가'로 버틴 그의 생애다. 바이에른 국립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베토벤 교향곡 4번의 실황 연주 음반은 이채롭게도 제작사인 '오르페오'가 관객의 환호까지 녹음으로 남겼는데, 이제 듣게 될 4악장의 마지막 대목과 열렬한 박수는 고인이 된 카를로스 클라이버에게 이 세속 도시의 사람들이 바치는 가장 경건하고 아름다운 장송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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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푸키멀더

작년말 21번째 국립공원에 등극… 일등공신 박선홍씨

무등산, 光州의 상징으로
일제시대, 6·25로 황폐화돼 안타까웠어… 그래서 무등산 살리기 운동 시작했지
이제 내나이 88세, 평생의 소원 이뤘어

2000년 무렵엔 市에서 반대
당시에도 국립공원 승격운동 벌였는데
市 간부 찾아와 "중앙정부로 넘어가면 市가 할일 없잖아요, 그만두세요" 종용

지난 1일 오전 7시쯤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 자락 증심사 입구. 시민 2000여명이 모여 무등산 국립공원 승격을 자축하고 있었다. 떡국과 주먹밥을 함께 나누며 신년 덕담을 주고받았다.

광주 도심에서 지척으로 바라다보이는 무등산은 광주의 역사와 사람들을 안아온 어머니와 같은 진산(鎭山). 24년 만에 새로 지정된 21번째 국립공원이 됐다. 시민들이 '가슴앓이'를 하는 가운데 지난달 27일 들려온 소식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인사들은 감회가 남달랐다. 특히 이 단체를 이끌며 평생 광주와 무등산 사랑으로 일관한 박선홍씨는 "이제 시민 여러분께서도 긍지를 갖고 앞으로도 무등산을 더욱 사랑하자"고 말했다. 강운태 광주시장은 "이제 국립공원 승격을 계기로 지난날의 아픔을 털고 상생과 도약의 새로운 광주 시대를 열자"고도 했다.

일제가 이 강토를 강점했던 1940년대 초반, 광복 이후, 6·25를 거치면서 무등산은 황폐화하였다. 광주에서 나고 자란 청년 박선홍은 일찍이 "우리의 무등산을 살려야 한다"며 애향 운동과 시민운동의 깃발을 올렸다. 이제 광주 시민의 사랑을 바탕으로 무등산을 푸르게 가꾸었고, 광주의 상징으로 자리하게 했다. 그게 국립공원 승격으로 '공인(公認)'받았다. "이제 제 나이 팔십팔, 평생의 소원을 이루었다"고 말한 박씨를 무등산에서 만났다.

 평생 무등산을 사랑해온 박선홍씨는 “무등산이 이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며 “앞으로 더욱 무등산을 가꾸고 사랑하자”고 말했다. 이미지는 2010년 1월 촬영한 눈 내린 서석대를 배경으로 지난 1일 무등산에서 촬영한 박씨의 사진을 합성했다. / 김영근 기자
"광주가 바로 무등산"

―감회가 깊으시지요?

"생전에 (지정)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무등산을 다니기 시작했지만, 특히 6·25 후에는 산이 참 험했습니다. 일제 때 (억새와 풀까지도) 군용 마초(馬草)로 베느니, 송탄유(松炭油)를 만드느니 하면서 소나무를 마구 벌채해서 황폐해졌어요.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군사용으로 목탄(木炭)을 만들기도 했어요. 그 일제 말기에도 제가 광주시청 계장에게 항의했습니다. 6·25 때는 군사작전을 하면서 산을 많이 버렸습니다. 주민들은 또 아무나 올라서 땔나무를 하고 그랬어요. 숯굴이 도처에 있었고, 산은 벌거숭이가 되었어요. 그런 산이 이젠 푸르게 되었고, 시민뿐 아니라 국민의 사랑을 받는 산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기쁘지 않겠습니까."

―광주 시민들에게 무등산은 어떻게 각별합니까.

"흔히 어머니와 같은 산이라고 하지요. 광주 사람들에겐 신앙의 산이지요. 경관이 빼어나고, 문화가 있고, 역사를 품어온 산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무등산을 보며 춘하추동 계절의 변화를 알았어요. 어르신들이 '무등산에 세 번 눈이 오면 평지에 눈이 온다'고 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보고, 저녁에도 바라보며 '오늘 하루 무사했구나' 위안을 받으며 살았어요. 광주 사람들에겐 광주가 무등산이고, 무등산이 광주입니다."

무등은 '무돌'의 이두음(吏讀音)이다. 습지를 뜻하는 옛말 물들, 물둑, 무들, 무돌을 차자(借字) 표기했다. 지리학 연구자들은 과거 광주 들판이 습지였다고 말한다. 조강봉 우리지명연구회장은 '갈라진 돌'로 풀이한다. 그밖에 무돌을 '무지개를 뿜는 돌'이라거나, 무등(無等)을 '등급과 차별이 없는 산(평등 세상)'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인연이니, 평생인 듯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무등산 얘기를) 자장가로 들었지. 어머니도 절에 다니시니 일 년에 한두 번씩 무등산에 갔어요. 우리 학교 다닐 때 (무등산에 오르는) 순서가 있었어요. 1학년 때부터 광주천, 태봉산(시내에 있었음), 증심사, 약사암, 원효사를 순서로 오르다, 6학년 되면 정상에 가는 거여. 기막히지 않아요? 전통 있는 학교, 예를 들면 광주서중, 서석·수창학교는 학교림이 무등산에 있었어요. 고학년들은 학교림을 찾아가 나무도 심고, 등산도 하면서 산을 가까이 지냈어요."

―산이 (도시와) 가까우니 복이 아닌지요? 그래서 '광주 사람들은 옆 동네 마실 가듯 무등산을 찾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산이 지척입니다. 30분이면 산에 다다릅니다. 150만 도시권에 이런 산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복이지요. 1187m 무등산은 대체로 토산(土山)이어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습니다. 곳곳에 약수가 솟아 산행객의 갈증을 풀어주지요. 산기슭 증심사에서 두어 시간 보행으로 정상까지 오를 수 있어요."

환경부에 따르면, 2010년 무등산에 오른 이는 모두 679만명. 같은 해 북한산 탐방객은 851만명이었다. 무등산 탐방객 규모는 국립공원 중 둘째로 많은 숫자이다. 무등산은 2015년 1000만명으로 예상한다. 무등산 정상 부근에 있는 입석·서석대(주상절리대)는 천연기념물 465호로 유네스코자연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기둥 모양의 돌들이 서 있는 무등산 주상절리대에 대해선 최남선이 '서석대는 마치 해금강의 한쪽을 산 위에 올려놓은 것 같다'고 했다.

"무등산 사랑은 애향·시민운동"

 박선홍씨는 무등산과 광주에 관한 자료를 평생 축적해왔다. 그는 “이젠 서서히 (자료의 수집과 정리, 보관에 대해) 정리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광주학(學)을 잇고 있는 후학들은 박 선생을 모시고 ‘광주 이야기’를 듣는 것을 최고의 행운이라고 여기고 있다. / 김영근 기자
―과거에도 국립공원 승격 운동이 있었는데요.

"2000년 무렵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등 시민단체 중심으로 운동을 펼쳤습니다. 당시 광주시가 암묵적으로 반대했어요. 당시 광주시 간부가 와서 그래요. '앞으로 하지 마세요. 중앙정부 권한으로 넘어가면 광주시가 할 일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국립공원이 되면) 무등산을 옆에다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데 뭐하러 그럽니까'라고요. 이제야 말하는데, 수모를 당한 거지요. 험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강운태 시장이 고마운 것이지요. 지방 장관이 서둘지 않으면 안 돼요. 앞장서서 된 것이지요. 군 시설이 있는 무등산 정상을 시민들에게 개방한 것도 강 시장입니다. 정말 시민들의 숙원을 푼 것이지요. 현역 시장이 무등산 정상을 간 것도 강 시장이 처음이에요. 예전 이런 일도 있었어요. 5·16 직후 자기도 모르게 목이 떨어진 광주시장이 전화를 했어요. '오늘 그만두게 됐어요. 무등산이나 갑시다' 하고."

―무등산보호단체협의가 펼친 시민운동에 힘입었겠지요?

"1989년 이 단체를 만들었고, 대표를 맡았지요. 산악단체와 민간단체들이 모인 거죠. '무등산을 보호하자'는 자각 운동이었습니다. '쓰레기를 버리지 말고 주워서 내려오자' '취사하지 말고, 도시락을 가져가자' '계곡에서 세제를 쓰지 말자' '웃으며 인사하자' '무등산을 아끼고 사랑하자'는 다섯 가지를 내걸었지요. 차츰 사회단체들이 참여하고 나중에는 시민운동으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취사 안 하기'는 모든 국·도립공원으로 확산되었어요."

―특히 1980년대 무등산 해맞이가 전국적으로 관심을 모았는데, 문제는 없었나요?

"섣달 그믐날 밤, '정월 초하루 해맞이한다'고 무등산을 올라요. 5·18 이후에 전국에서 광주로 모여듭니다. 광주YMCA에서 모여 대회를 하고, 해맞이하자며 무등산에 오릅니다(1980년 이후 시민들과 각지에서 광주를 찾아온 이들이 함께 등산했다. 정상 아래인 중머리재에서 수만 명이 모여 모닥불을 피우고 꽹과리를 치며 목이 터지게 외쳤다. 무등산에서 역사의 아픔을 위로받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1980년 이후 광주는 '빛고을'로 불리며 '청년 학도'들에게는 성지순례 코스로 여겨졌다). 우리가 5·18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은 좋지만, 무등산의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삼가자고 한 것이지요. 캠페인이 효과를 보았습니다. 1991년부터 해맞이 때의 산림 훼손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위대한 광주 정신의 발로가 아닐 수 없었지요."

무등산 정상권에는 군사시설이 있어서 1966년 이후 민간인들의 출입을 통제해왔다. 1990년 정상 아래 서석·입석대 주변이 개방되었다. 정상부 시설 이전 요구는 1990년대 중반부터였다.

―무등산 정상을 복원하자는 운동도 펼쳤는데요,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사실은 말을 못 했습니다. 군부와 관련이 있어서요. 간절했지만, 맞서 싸우는 것으로 생각돼서 정말 꺼내기 어려웠습니다(옆에 있던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정순택 공동의장이 보충 설명했다. 1995년 공식적으로 '군시설이 있는' 정상을 돌려달라 했다고 말했다. 바로 그 전에 군부대와 교감이 좀 있었고, 그때 정상에 있던 중요한 군사시설이 다른 데로 옮겨졌다는 것도 알게 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김영삼 정부 들어서서 누그러진 분위기도 한몫했다). 1996년 정상 아래에 있는 부대 건물은 없애고 억새가 자라도록 복원했어요. 아직 정상의 부대와 방송사 송수신탑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시민운동 차원에서 '무등산 공유화 운동'도 벌였어요. '무등산 땅 한 평 갖기'였지요. 이 운동은 영국 옥타비아 힐(1838 ~1912)이 1895년 일으킨 토지 신탁(national trust) 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습니다. 2001년 한국 최초의 토지 공유화 운동을 시작한 거지요. 무등산을 무분별하게 개발하거나 훼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기부받거나, 이를 사들일 수 있도록 기금을 모으는 것입니다. 성과를 거두었지요. 그리고 무등산사랑환경대학도 열어 시민들의 무등산 애호 정신을 일깨웠습니다."

저술로도 애향 운동

 박선홍씨가 펴낸 책자 ‘무등산’과 ‘광주1백년’
―등산활동뿐 아니라 '무등산'저술로도 기여하신 것으로 압니다만.

"광주상공회의소에 있을 때 외지인들이 오면 광주를 한번 돌아보자고 해요(그는 조선대 전문부 경제학과를 제1기로 수료하고 광주시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1949년 광주상공회의소로 옮겼다. 당시 상의 사무국장이 '시에서 상공 업무를 보았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1952년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자(당시 광주여객자동차 사장)가 광주상의 회장으로 부임, 평생의 연을 같이했다. 박씨는 1994년까지 광주상의에서 상근 부회장을 맡으며 '광주를 생산 도시로 만들자'는 목표를 갖고 활동해왔다). 그런데 무등산이 있지만 올라가기는 그렇고, 지실을 가면 참 좋아합니다(지실마을 일원은 무등산 아래에 있는 곳으로, 16세기 호남을 대표하는 사림 학인들과 시인 묵객들이 모여들어 가사 문화를 꽃피웠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원림 소쇄원이 있고, 정철이 성산별곡을 읊었던 식영정 등이 있다. 호남 각지에서 숱한 인물이 모여든 '호남 문화의 센터'였다). 손님 안내를 하려다 보니 처음엔 몇 페이지 프린트 안내서를 만들었어요. 끊임없이 자료를 모았지요. 곳곳을 직접 찾아가면서 자료를 모았습니다. 처음엔 무등산을 넘어서 지실을 가면 하룻밤을 자고 와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정도였지요. 그러다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했어요. 이렇게 하다 보니 7판(2008년)까지 한 것이지요('무등산' 책자는 1976년 출간, 증보를 거듭해왔다. 무등산의 유래와 전설·경관을 비롯해 문화, 역사, 개발 과정 등을 망라한다). 더러는 사 가기도 했지만, 대부분 제가 손님들에게 드렸지요. 돈벌이가 된 것은 아니었고."

―'무등산'이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요?

"초판 당시 산 하나를 가지고 종합적으로 낸 것은 별로 없었던 모양이오(지금까지 무등산에 관한 글이 대부분 이 책에 근거하고 있다. 이미 '고전'이 되었다). 제가 놀란 것이 '유서석록(遊瑞石錄)'입니다. 그렇게 상세할 수 없는 무등산 기행입니다. 임란 때 의병장으로 앞장서 두 아들과 함께 순사한 제봉(霽峯) 고경명(1533~1592)이 1574년 당시 '서석은 내 고향의 산'이라며 광주목사와 함께 5일간 무등산에 오르고 남긴 기록이지요. 참 위대한 분이시지요."

―'광주1백년'도 있지 않습니까.

"몇 가지를 적어보았어요. 모아지니 책이 됐어요. 어떤 선배가 글을 보더니 '이게 광주 역사다' 해요. '아이고 제가 역사를 배운 것도 아니고 잊어버릴 수 없어서 적은 겁니다' 했더니, 그 선배가 '광주1백년이라고 해라'고 해요. '아이고, 겁납니다' 했더니, 또 '사람이 통도 크고 그래야지 너무 위축되지 마라'고 해요. 그래서 대담하게 '광주1백년'이란 책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시골(전남 장흥)서 올라오셔서 광주 충장로에 자리를 잡으셨어요(그의 선친은 충장로5가에서 피복 도매상을 했다). 어쨌거나 저는 광주를 고맙게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살아왔고, 또 자식들 기르고 살았으니. 지금 개정판 작업하고 있습니다. 1권은 엊그제 출간했고, 2권 작업 중이에요. 책은 떨어지고 없고, '아직 움직일 수 있는 힘은 있는데' 하던 차였습니다. 광주문화재단에서 (개정판) 요청이 왔어요. 작년 문화재단에 '무등산'과 '광주1백년'에 관한 지식재산권을 기증했더니, 고맙다고 하더군요. 개정판 기회를 주니 저도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광주1백년'은 1994년 세상에 나왔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광주의 역사와 문화, 풍물과 세속, 상공업과 체육, 인물을 망라하였다. 그는 1987년부터 20년 동안 광주민학회를 이끌며 시민들과 문화유산을 답사하고 자라나는 세대에게도 지역의 문화를 전수하고자 힘썼다. 서울대 국문과 권영민 교수는 "박선홍의 광주에 대한 집착은 광주에 대한 신앙과도 같고, 광주학(光州學)이라고 할 정도의 학문적인 깊이와 전문성을 가졌다"고 평했다.

―광주 사랑이 참 대단하시군요. 그 출발이 등산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요. 6·25가 끝나고 1955년이었습니다. 광주·전남에서 처음 (전남)산악회를 조직한 거지요. 당시 한국산악회 지도를 받아 창립총회를 했어요. 그때 조선일보 주필이셨던 홍종인(1903~1998) 선생께서 산악회장을 맡아 이끄셨어요. 1년 뒤 홍 선생과 이숭녕(1908~1994) 서울대 교수 일행을 광주에 모셨고, 지리산에 올랐습니다. 산악 장비 전시회도 하고 강연회도 하면서 '산악 운동은 국토를 보존하고 애호하자는 운동'이라는 점을 알렸어요. 그때도 지리산에서 '(토벌)작전'이 있을 때여서 경찰관의 호위를 받으면서 올랐어요. 등반을 배우려고 한 것입니다. 노고단 야영 중 한밤중에 폭풍우가 몰아쳐 천은사로 내려왔다가, 주민 신고로 경찰 부대가 출동하는 사태도 벌어졌어요. 그때 회원들이 홍 선생을 깍듯하게 모시고 예의를 갖춰 등반하는 모습을 보고, '산악인의 정신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버너, 코펠, 닭털 침낭 등 등산 장비를 산에서 사용하는 것을 처음 보았어요."

―광주 사람들이 등산에 호응했습니까?

"1956년 첫 등산 대회를 열었습니다. '6·10만세 기념 무등산 등산 전국 대회'였어요. 대회 경험이 없어 진행 요령이나 규칙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시내 충장로1가에서 출발해 무등산 정상까지 달리는 것이었으니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어요. 2년 뒤 전남산악회와 전남대 산악부를 규합하여 무등산악회를 발족하고 '산악 운동을 펼치자'고 했어요. 발족하자마자 무등산 등산 안내 표지판 130여개를 만들어 세웠습니다. 첫 무등산 등산 코스 표지판이었지요. 회원들은 봄이면 무등산에 나무를 심었고, 등산로에다 코스모스씨를 뿌려 꽃길을 만들었습니다. '자연 앞에 겸허하자' '산을 아끼고 사랑하자'며 등산 대회를 계속 열어 시민들과 학생들이 참여토록 했습니다. 또 제가 보이스카우트 지도사로도 활동하면서 학생들에게 무등산 야영 생활을 통해서 애향심과 함께 자립심,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도록 했습니다. 산악회 활동과 보이스카우트 지도 활동은 밀접하지요."

―1950년대 무등산은 민둥산이 되었고, 도로도 막혔다고 하던데….

"제가 광주상의에서 일해왔지요. 박인천 상의 회장께서 습진으로 고생했는데 무등산 원효계곡에서 물을 사나흘 맞고 깨끗하게 나았어요. 그때 그래요. '무등산이 경치도 좋고 하니 전국에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개발도 하고 말이오.' 그래서 상의가 무등산 개발도 걸머졌습니다. 6·25 때 작전하면서 개설했던 군인 경찰 이동로이자 물자 수송로를 관광 도로로 내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어요. 광주시청에 건의했더니, '그런 돈은 없고 민간 자본으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해요. 그래서 박 회장께서 '그러면 내가 돈을 내고 주민들과 함께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지요. 그랬더니 무등산 주변 주민들이 '우리 평생소원'이라며 크게 반겼습니다."

―당부의 말씀도 있으실 듯합니다.

"무등산은 바로 광주입니다. 광주의 정신이 여기서 비롯됩니다. 무등산은 임진왜란 의병장 충장공(忠壯公) 김덕령(1568 ~1595) 장군이 활동했던 역사 공간이지요. 3·1 독립운동의 시발인 2·8 독립선언 운동의 주역이 광주 사람들입니다. 학생 독립운동도 그렇습니다. 10대의 소년들이 국권 회복을 위해서 싸운 예가 세계적으로 어디에 있습니까. 제2의 학생 독립운동이 1943~45년 광주에서 있었어요. 이게 기막힙니다. 학생이 넷이나 일본 형사들한테 맞아서 죽었어요. (광주 도심에 있었던) 경양방죽 물속에 처넣었습니다. 3·1운동 때에도 학생 독립운동 때에도 학생이 죽지 않았어요. 그런 면면한 정신이 5·18로도 이어졌습니다. 호연지기가 무등산에서 비롯된 것이지요(5·18 당시 시인 김준태는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란 시를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로 시작하며 광주의 아픔을 표출하였다). 이제 시민의 사랑을 바탕으로 그 무등산이 국립공원이 되었습니다. 풀이고 나무고 그곳에서 잘 자라도록 해야 해요. 과잉 시설을 하면 안 됩니다. 무등산을 더욱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는 광주학의 선구로 인정받아 2011년 조선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4~99년엔 조선대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장수·노화과학 연구의 권위자 박상철 전 서울대 의대 교수의 부친이다. 대한산악연맹 창설 50주년 때 '산악인 50'에 선정됐다. 여전히 박람강기(博覽强記)하는 르네상스적 인물로 시민의 존경과 신망을 받는 광주의 어른이다. 지금도 광주 도심 '금남로1가 1번지'에 있는 효성문화재단으로 매일 출퇴근하며, '광주1백년' 개정판 원고를 가다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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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푸키멀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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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1월 22일 금요일 낮 12:30분(UTC 18:30) 텍사스주 달라스에서 총성이 울립니다.

 

총알 한 발은 두 남자에게 일곱 군데의 총상을 입히고, 뒤이은 한 발이 한 남자를 절명시킵니다.

 

그리고 이날은 미국인에게 있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1963년 9월,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대통령(이하 케네디)은 11월 22일

텍사스주 달라스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선거유세 활동을 결정한다.

 

· 다음연도 11월에 열릴 대통령 선거 앞두고 민주당 선거전 자금의 기부를 구하기 위해

· 당시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텍사스의 민주당 유력 멤버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 재선을 향한 선거 활동의 개시

 

그리하여 달라스 교외의 '달라스 트레이드 센터'에서 연설을 실시하기 위해 '달라스 러브 필드 공항'

으로부터 '딜리 광장'을 포함한 다운타운을 카퍼레이드로 통과하는 계획안이 세워졌다.

 

한편, 카퍼레이드에 쓰일 차량으로 1961년형 링컨 콘티넨탈을 오픈 탑으로 개조한 퍼레이드 전용 리무진이

채택되었으며 당초 관할의 달라스 시 경찰본부와 '시크릿 서비스(국가 요인에 대한 미국의 비밀경호관)'의

저격이나 투석 등에 대비한 투명 방탄 커버를 오픈 탑에 씌운 다음 퍼레이드를 실시하자는 권고에도 불구

다음 해에 열릴 재선을 향한 선거를 목전에 두고 국민에 대해 친해지기 쉬운 이미지와 의연한 이미지를

어필하고 싶었던 케네디와 측근들로 인해 방탄 커버 사용의 제안이 묵살되었다.



<암살된 해 6월 27일 아일랜드를 방문하며 투명 방탄 커버, 즉 버블 탑을 착용한 오픈 톱 리무진을 탄 케네디>

 

결국 이렇게 국민에 대한 이미지 전략을 과도하게 중시하던 케네디와 그 측근들은 카퍼레이드 유세 한 달 전

달라스를 방문했다가 괴한으로부터 폭행당한 유엔 대사와 유세 당일 달라스 모닝 뉴스에 반케네디파가 실은

케네디 수배전단으로 인한 염려에도 오픈 톱 카퍼레이드를 고집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C123 수송기에 의해 워싱턴으로부터 옮겨진 퍼레이드용 리무진에 버블 탑으로 불리는 방탄유리

지붕의 착용 여부가 당일 날씨에 따르기로 되었는데, 이날 달라스의 일기 예보엔 온종일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보되었으나 기구하게도 도착 1시간 전부터 날씨가 회복되며 하늘이 맑아져 버블 탑의 사용이 없던 일로 되었다.

 

결국, 러브 필드 공항으로부터 퍼레이드 사용될 차량엔 케네디와 그의 아내이자

퍼스트레이디인 재클린 케네디, 텍사스 주지사 존 코널리, 그의 아내 넬리 코널리가
오픈 탑 리무진에 탑승했고 운전수와 
조수로 로이 켈러맨과 빌 그리어가 동승 중이었다.


   

 

그렇게 링컨 콘티넨탈을 중심으로 한 퍼레이드의 차 열은 낮 12시가 조금 안되었을 때 러브 필드 공항을 출발해

달라스 시내를 16km/h 전후의 속도로 목적지인 달라스 트레이드 센터까지 이동 중이었고, 비록 퍼레이드 루트에

따라 케네디에 비판적인 일부 단체가 플랜카드를 배치하거나 전단을 뿌리는가 하면 군중들 속에서 일부가 항의

피켓을 들고 있기도 하였지만 시크릿 서비스가 큰길에 들어서자 달려온 한 남성을 제압한 것 외엔 케네디가

몇몇의 수녀와 어린이들과 악수하기 위해 퍼레이드를 두 번 멈추는 동안에도 아무 일 없이 퍼레이드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예정보다 4분 늦게 퍼레이드 차 열이 딜리 광장에 진입하여 1분 후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를 지나치는 순간

폭음이 들려왔고 이에 케네디는 군중들을 향해 흔들던 손을 멈추었고 코널리는 소리가 난 우측방향을 쳐다본다.

 

두 번째 폭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케네디의 두 손이 목 부위로

향했고 이에 재클린은 이상을 눈치채고 남편 쪽으로 몸을 향한다

 

한편, 앞좌석의 코널리는 고통스러운 듯 뒷좌석의 케네디를

한번 쳐다보고는 아내 쪽으로 몸을 기대며 다음과 같이 외친다.

 

"No, No, No! 큰일이야, 모두 죽을 거야!"

<주의: 암살 장면을 담은 영상임을 사전에 숙지하시기 바랍니다>


이에 운전수 로이 켈러맨은 뒤를 쳐다보았고, 바로 그 순간 또 한 번의

폭음이 들리며 그의 눈앞에서 케네디의 머리 일부가 날아갔다.

 

다음 순간 딜리 광장은 그야말로 패닉상태가 되었고 링컨 콘티넬탈은

속도를 올려 곧장 파크 랜드 메모리얼 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앞좌석의 존 코널리 주지사는 중상을 입었음에도 아내가 그를 자신의

무릎 위로 끌어올리듯이 한 것이 직접적으로 폐에 공기가 유입되고 있던 것을

막아주어 생명을 구할 수 있었으나 케네디는 머리에 총격을 받아 즉사하고 만다.


 

1963년 11월 22일 금요일 낮 12:30분(UTC 18:30) 텍사스주

달라스에서 울린 세 번의 총성 이후 상황은 다음과 같다.

 


· 74-90초 후: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두 번째 층의 간이 식당에서 교통경찰관 마리온 베이커리와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의 감독관 로이 트룰리에게 리 하비 오스왈드가 목격





· 2분 후: 로버트 리드 부인과 서기 감독관이 사무실로 복귀하며 간이 식당에서 오스왈드를 목격



· 12시 30분-39분: 사건 현장의 큰길가에 있는 언덕의 주차장과 철도 정차장을 수색



· 12시 40분: TV에서 뉴스 속보가 방송되었으며 오스왈드는 시내버스에

                 승선했으나 교통 체증으로 인해 두 블록 후에 하차





· 12시 45분-54분: 자신의 순찰 지역인 south Oak Cliff 주거 지역에 있던 교통경찰관 JD 티피트는 central Oak Cliff

                         지역으로 이동해 도시의 중심 부근을 수색하기 위한 명령에 따라 54분 이동을 완료


                         한편, 케네디 암살 용의자를 설명하는 방송에서 범인을 30대가량의 백인 남성에

                         약 178cm의 키에 75kg 정도의 날씬한 외형이라고 방송

                         (이는 암살 당시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 창문을 통해 범인을 본 목격자의 증언에 따른 것)

 


· 13시: 파크 랜드 메모리얼 병원에서 두 명의 신부에 의해 사망한 케네디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선고

          한편, 시내버스에서 하차한 오스왈드는 곧바로 택시를 타고 자신의 집인 1026 North Beckley에 도착

          이후 자신의 방에서 옷과 0.38구경 스미스 앤 웰슨 모델 10을 챙긴 오스왈드는 수분 안에 다시 집을 나섬



 

 

· 13시 11분-14분: 이후 자신의 집에서 남동쪽으로 1.4km가량을 걷던 오스왈드는 Oak Cliff의 East 10th Street와

                         North Patton Avenue 모퉁이 근처를 순찰하던 JD 티피트에 의해 목격되었고 방송 설명과 비슷한

                         인상착의의 오스왈드를 불러 세운 뒤 차에서 내리는 순간 JD 티피트에게 3발의 총을 발사해

                         가슴에 명중시켜 쓰러뜨린 뒤 그에게 다가가 머리에 확인사살을 위해 1발을 추가로 발사



 


· 13시 12분-15분: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3발의 탄피와 라이플총을 발견한 달라스 경찰이 건물 수색을 실시





· 13시 30분-35분: 백악관 대변인인 말콤 킬더프가 케네디가 죽었다고 공표

 


· 13시 40분: 신발 가게 매니저 조니 브루어는 자신의 가게 입구 벽면의 공간에 숨어 있다가

                   근처의 텍사스 극장에 요금을 지불하지 않고 서둘러 들어가는 것을 수상하게

                   여겨 극장의 매표원에게 주의를 시키는 동시에 13시 40분 경찰에 신고


 

 


· 13시 50분-56분: 극장 내 조명을 키고 조니 브루어의 오스왈드가 극장

                         뒤쪽 근처에 앉아 있다는 확인을 받은 경찰이 그를 연행

                         (이 과정에서 한 경관이 오스왈드에게 가격을 당하며 몸싸움이 있었고

                         오스왈드는 극장 밖으로 연행되며 자신이 경찰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소리침)



 


· 14시경: 짐 리벨 형사가 경찰서 건물에서 오스왈드를 JD 티피트 경찰 살해 혐의로 조사

             경감 JW 프리츠가 JD 티피트 살해 혐의를 받은 남자의 이름이 오스왈드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오스왈드가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에서 사라진 케네디 암살범의

             용의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였으므로 늦은 밤 두 사건 모두에 대해 기소 절차를 밟음

 


· 14시 15분: 케네디의 시신이 파크 랜드 메모리얼 병원에서 에어포스 원으로 이송

 


· 14시 38분: 함께 탑승해 있던 당시 부통령 린든 존슨이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며 역사상 최초로 에어포스 원에 두 명의 대통령이 탑승



 


· 18시 5분: 에어포스 원이 워싱턴 DC 근처 앤드류스 공군 기지에 도착해 해군 병원으로 이송

 


· 19시: 오스왈드가 JD 티피트 살해 죄로 체포

 


· 23시 36분: 오스왈드가 케네디 암살 혐의로 체포




· 23일: 부검을 끝낸 케네디의 시신을 해군 병원에서 백악관으로 이송

 


· 24일 11시 21분: 달라스 경찰서 뒷마당에서 주 교도소로 이송되던 오스왈드가

                        갑자기 튀어나온 잭 루비라는 사람에게 총격을 받고 사살됨


 

 

· 13시 7분: 근처 파크 랜드 메모리얼 병원으로 이송된 오스왈드가 사망했다고 공표

 

 

 

의혹, 그리고 반론

 

· 오스왈드가 최초로 목격된 것은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의 두 번째 층 간이 식당에서 교통경찰관

  마리온 베이커리와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의 감독관 로이 트룰리에게 목격된 것인데 시간상으로 가능한가

 

- 공식 조사위원회인 워런 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조사위원과 마리온 베이커리, 로이
  트룰리의 여러 번의 시간 테스트 
결과 오스왈드가 6층에서 저격 후 총을 숨기고
  마리온 베이커리와 로이 트룰리 보다 앞서 2층으로 내려오는 것이 가능한 것으로 밝혀짐




· 오스왈드가 케네디 암살이 있던 순간 간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

 

- 사실무근이며 오스왈드가 케네디 저격이 있은지 2분 후 2층 간이식당의 자판기

  앞에서 콜라를 마시고 있는 것이 로버트 리드 부인과 서기 감독관에게 목격되었을 뿐


 



· 케네디의 시신을 본 파크 랜드 메모리얼 병원의 의사들은 케네디가 앞쪽에서 총을 맞았다고 하였으나

  이후 공식적인 부검보고서를 작성한 해군 병리학자는 뒤에서 총을 맞았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

 

- 케네디가 파크 랜드 메모리얼 병원으로 후송되었을 때 의사들은 대통령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응급처치에만  몰두하고 있었으며 케네디는 내내 하늘을 본채로 똑바로 누워 있었다


  이 때문에 목 뒤의 관통된 총상을 보지 못했던 의사들은 케네디가 앞쪽에서 총격을 받은 것으로

  착각했고 이후 부검보고서를 접하고는 앞쪽의 총상이 입구가 아닌 출구라는 것에 동의하였다

 



· 케네디 암살 순간 비 오던 날씨가 개었는데도 차량 오른편에 검은 우산을 펼친 채 서 있는

  남자가 있었는데 이 미스터리한 '엄브렐라 맨(The Umbrella Man)'의 정체는 무엇인가

 

- 날씨가 개었는데도 불구하고 우산을 쓰고 있었다는 이유로 그는 미스터리하게 비추어졌으며 특히

  음모론 옹호론자들과 로버트 커틀러의 '우산으로 꾸민 다트 독살설'로 인해 더욱 미스터리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엄브렐라 맨은 1974년 열린 하원 암살 청문회에 나와 자신의 이름이 루이스 위트이며

  당시 가지고 펼친 채 들고 있었던 우산을 공개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이러한 주장에도 일부

  음모론 옹호론자들은 우산살의 개수가 맞지 않다는 억지를 쓰기도 했다


 



· 케네디 암살 직후 3인의 부랑자가 달라스의 경찰에 의해 연행되는 사진이 찍혔는데 이들 중 2명은

  하워드 헌터(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도청팀의 책임자이며 CIA에서 장기간 근무했고 1961년 피그만 사건 때

  망명 쿠바인을 이끌었다)와 프랭크 스터저스(한때 CIA에서 계약직으로 일했으며 하워드 헌터와 함께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도청을 시도하던 팀원으로 CIA, 마피아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알려짐)이며

  이들이 케네디를 암살한 후 부랑자 행세를 하여 사건 현장을 빠져나간 것이다


  이후 연행된 이 3인은 경찰에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으며 경찰 또한 달라스 경찰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 모두 음모론 옹호론자들의 날조이며 이 사진은 케네디 암살 후 퍼레이드 근처

  고가 철도의 기차에 3인의 부랑자가 숨어 있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마빈 L
  와이즈 경관과 
빌 베스 경관이 연행하던 순간이 기자들에 의해 찍힌 것이다


  이후 이 3인의 부랑자들은 조사 결과 암살과 관련이 없음이 밝혀졌고 그들은

  각각 거스 아브람스와 해롤드 도일, 그리고 존 게드니라는 사람이었다


  



· 케네디가 목 부분에 총격을 받은 뒤 약 2초 후에 찍힌 사진에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건물의 계단에서 퍼레이드를 보고 있는 직원들 사이로 오스왈드가 찍혀 있다

 

- 그는 오스왈드가 아니라 같은 회사, 즉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의 직원인 빌리 놀란 러브레이디이다


  심지어 사진엔 그의 원형 탈모가 고스란히 찍혀 있다





· 케네디 암살 당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촬영하던 스카프를 쓴 여인이 있었는데

  이 여인은 총소리가 난 후에도 전혀 패닉을 일으키지 않은 채 끝까지 촬영하였다


  이후 이 여인은 달라스 시내의 Colony Club이라는 오스왈드를 암살한 잭 루비의

  술집 옆에 위치한 술집에서 일하던 스트립 걸 비벌리 올리버로 그녀는 자신이 찍은

  '가장 가까이서 촬영한 케네디 암살 필름'을 케네디 암살 3일 후 자신이 일하는

  클럽으로 찾아온 2명의 남자에게 넘겨 주었으며 그 중 한 명은 FBI 뉴올리언스

  지부의 레기스 케네디였고 그는 마피아와 가까웠던 사람이었다


 
 

 

- 일단 스카프를 쓴 여인을 칭하는 'The Babushka Lady'라는 단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러시아어로 할머니, 또는 늙은 여인을 뜻하는 것으로 당시 이 여인이 마치

  러시아의 할머니처럼 노인이 착용하는 스카프와 옷차림을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물론 그녀가 총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촬영을 한 것은 사실이나 그녀 외에도 본능적으로
  끝까지
 촬영한 사람들이 있으며 대표적으로 케네디가 총격을 입은 뒤 차량이 속력을 내
  터널 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흔들림 없이 촬영한 Abraham Zapruder가 있다
  (이후 그의 이름을 딴 Zapruder Film은 케네디 암살의 중요한 증거물로 사용되었으며
  역사상 가장 유명한 8mm 필름이자 라이프 잡지사에 15만 달러에 팔린 필름이기도 하다)


  한편, 자신이 The Babushka Lady라고 주장한 비벌리 올리버는 당시 17살이었으며
  그녀가 촬영하는 데 사용했다고 
주장한 Super-8 Yashca는 1967년까지 존재하지 않던
  모델이었으며 그녀가 사건 당시 있었다고 말한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본 적이
  없다고 진술하였고 그녀는 단지 자신의 회고록을 출판하기 위해 그러한 주장을 한 것


  게다가 그녀가 자신의 필름을 넘겨 주었다고 주장한 레기스 케네디는 그녀가 주장한 날에

  뉴올리언스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며 저녁에는 딘 앤드류스라는 사람을 인터뷰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케네디 암살 현장을 필름으로 담은 묘령의 여인이 누구인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 오스왈드를 암살한 잭 루비는 마피아와 CIA, 그리고 달러스 경찰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직접적으로 케네디 암살에 연관이 있었거나 사주를 받아 오스왈드를 암살한 것은 아닌가



 

- 케네디 암살과 관련해 모든 음모론자들이 잭 루비를 마피아, CIA, 달러스 경찰서와

  모종의 커넥션을 가지고 있었거나 오스왈드와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음모론자들을 제외한 잭 루비의 지인들과 공식적인 조사에서 그는

  힘 있는 마피아의 정식 일원이 아닌 체포되기를 반복하는 스트립 클럽의 잡범으로 알려졌다


  그가 달라스 경찰들과의 연줄로 인해 당시 주 교도소로 이송되던 오스왈드를 향해 자유롭게 총을

  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 그는 폭행, 주류법 위반, 자신의 가게에서 이루어지는 외설행위들로 인해

  빈번하게 체포되었었다, 우리는 잭 루비의 거대한 커넥션에 집중하기보다는 당시 경찰서 뒷마당에서

  오스왈드를 이송하며 경비를 허술하게 한 달라스 경찰서의 안일함도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한편, 그는 주변인들로부터 싸이코라고 불릴 정도로 감정적이고 조울증이 심한 사람이었는데

  케네디가 암살당하자 자기 클럽의 공연을 취소시키고 매우 화가 난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으며

  슬퍼하는 재클린 여사와 아이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오스왈드를 암살했다고 밝혔으나 이후

  영웅으로 떠받들어 짐과 함께 많은 돈을 받을 것으로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감옥에 들어가게

  되자 자신의 변호사에게 '감옥에서 하룻밤을 보낼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또, 오스왈드를 암살한 후 조수검찰에 '자, 너희들이 그것을 할 수 없어, 누가 그것을

  할 수 있겠나, 그 개자식이 내 대통령을 살해했어'라고 말한 잭 루비는 사형이 언도되자

  음모에 휘말렸다며 자신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있게 거짓말 테스트를

  끈질기게 요구해 결국 테스트가 이루어지지만 뻔한 결과가 나오고 만다


  사실, 그가 오스왈드를 암살했을 때 달라스 경찰 본부 밖의 군중들은 소식을 듣고

  박수를 터뜨렸으며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각지로부터 많은 응원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한편, 그가 진실을 말하려고 하자 암세포를 투입시켜 암살시켰다는 음모론이 있으나 사실 그는 많은

  인터뷰를 했으며 임종순간에도 자신의 변호사와 동생과 인터뷰를 하였고 자신은 오스왈드를 사건 전엔

  전혀 알지 못했으며 화가 난 상태에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를 향해 총을 쏜 후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많은 음모론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4년간 많은 인터뷰를 해오면서 어떠한 음모도 말한 적이 없다

  (한편, 그가 오스왈드를 암살하는 순간이 생방송으로 전파를 타며 큰 충격을 주었다)




 

 

마법의 총알(Magic Bullet), 그리고

 

케네디 암살 사건과 관련해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마법의 총알(Magic Bullet)이다.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 창문에서 쏜 단발의 총알로는 케네디와 앞좌석의 코널리에게 총 일곱 군데의

총상을 입히기는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며 오스왈드의 군시절 형편없던 사격솜씨로는 케네디의 머리에

정확히 저격할 수 없으므로 제2, 제3의 장소에서 오스왈드와 함께 케네디를 암살하기 위해 대기 중이던

저격범들과 케네디 암살을 주도한 배후가 있다는 것이 미국 국민 74퍼센트의 견해이다.


(배후에는 해체의 두려움과 피그만 작전의 책임 전가, 그리고 가짜 테러를 일으켜 쿠바와 공상권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명분을 만들자는 제안을 거절당한 CIA, 케네디가 대통령 당선 전과 후 가장 많은 힘을 빌린

자신들에게 그의 동생이 단속을 강화하며 뒤통수를 치자 분노한 마피아, 피그만침공 음모 실패로

케네디에게 배반당했다고 생각한 반카스트로파 망명 쿠바인들, 이러한 쿠바인들을 이용해 자신의 암살을

기도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스트로, 대통령이 되지 못했던 닉슨이나 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의 쿠데타,

전쟁 특수를 타고 호황을 누리다 베트남에서 철수할 계획을 세우던 케네디에 분노한 군산복합체, 냉전 시대

미국과 함께 주역이었던 소련, 연방준비제도의 권한을 약화시키려 한 케네디를 '처단'한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심지어 외계인의 존재를 밝히려고 했던 케네디를 암살한 외계인과의 협상을 전담하는 비밀방위위원회인

MJ-12와 빼놓을 수 없는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의 음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모론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오스왈드가 절대로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쏜 총알이 케네디를 맞혔을 수 없으며

때문에 단독범의 소행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말대로 음모의 희생양이었다고 굳게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케네디 암살 직후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린든 존슨이 케네디 암살 사건의 의혹과 전모를 밝히기 위해

당시 대법원장이었던 워런을 위원장으로 8명의 위원, 즉 워런 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케네디 암살 1주일
후에 
만들어진 이 위원회는 1964년 9월 27일까지의 조사 결과를 보고서로 만들어 발표한다.



 

하지만 당시 위원회원들이 CIA 출신이거나 공화당 소속으로 애초 오스왈드를 단독범으로 지정해

보고서를 만들었다는 의견과 많은 음모론 옹호자들의 마법의 총알 주장, 그리고 1975년 이러한

여론으로 인해 케네디의 암살 현장을 담은 Zapruder Film이 처음으로 TV를 통해 전국방송 되었고

끔찍한 참상을 그대로 담아낸 필름의 힘이 더해져 1976년 9월 또 하나의 논란이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에 대한 조사를 케네디 암살 사건 재조사를 병행키 위해 하원 암살소위원회가 발족하였다.

 

워런 위원회의 조사결과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했던 하원 암살소위원회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지만, 결론은 '오스왈드가 텍사스 교과서 창고 보관소 6층에서 창문을 통해 3발의 총을

발사했으며 이로 인해 케네디가 암살되었다'라는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왔으며 그나마

'오스왈드 외에 암살에 관련된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는 그들의 견해가 다소 위안이 될 뿐이었다.

 


 

케네디 암살의 진실은




케네디 암살 사건과 관련해 음모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가장 큰 증거는 바로 마법 총알이다.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쏜 총이 케네디의 등을 관통해 목으로 나온 뒤 갑자기 스스로
방향을 바꾸어 앞좌석 코널리의 오른쪽 겨드랑이 부근으로 들어가 그의 오른쪽 가슴 쪽으로

나와서는 오른쪽 손목과 부딪힌 후 차례로 오른쪽 허벅지와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렇게 총 두 사람에게서 일곱 군데의 총상(관통 두 군데, 총상 세 군데)을 남긴 것이야말로

오스왈드 단독범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동시에 케네디를 저격했음을 의미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인데도 불구하고 워런 위원회와 하원 암살소위원회에선 오스왈드가 쏜 단발이 두 사람에게

일곱 군데의 총상을 남겼으며 뒤이은 한발이 케네디를 절명시켰다고 공통적으로 발표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런데 이 마법의 총알이 사실은 아폴로 13호의 달착륙 조작설에 대표적인 증거물인 동시에

아폴로 13호가 당시 달에 실제로 착륙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인 것처럼 오스왈드가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홀로 3발의 총을 쏘았고 그 중 두 번째 총알이 두 사람에게

일곱 군데의 총상을 입혔고 마지막 세 번째 총알이 케네디를 절명시켰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다시 말하면 달착륙 조작설을 주장했던 음모론 옹호론자들이 대기가 없는 달에서 진자운동과

미리 준비해간 상단부분의 고정봉으로 인한 성조기의 모습을 바람이 부는 야외 세트장에서

촬영한 것이라는 무지에 의한(혹은 의도적인) 음모론 주장처럼 케네디 암살 음모론의

대표적인 증거인 마법의 총알 역시 무지에 의한(혹은 의도적인) 음모론 주장이다.



 



먼저 케네디의 등을 관통한 총알이 목 쪽으로 나올 수 없다는 음모론자들의 주장은
케네디 검시 보고서의 그림을 
증거로 하는데 사실 검시 보고서엔 비록 총상이

마치 등을 맞은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분명히 총알이 케네디의 귀 뒤 융기된 뼈

하단 14cm 지점을 관통했다고 설명되어 있으며 검시 보고서를 그린 쏜톤

보스웰도 총상의 위치에 맞게 자세하게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날라온 총알이 아래에서 위로 향했다는 오해는 풀렸어도 관통한
총알이 바로 앞좌석 코널리 주지사의 오른쪽 겨드랑이 부분을 관통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 역시 조악한 음모론일 뿐이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음모론 옹호론자들(특히 올리버 스톤의 영화 JFK)에게 
속은 것이다.


 

 


당시 케네디가 탑승한 1961년형 링컨 콘티넨탈을 오픈 탑으로 개조한 퍼레이드 전용 리무진은
음모론 옹호론자들의 
주장처럼 앞좌석과 뒷좌석이 서로 같은 높이에 수평 위치에 놓여 있지 않았다.


대통령을 위한 퍼레이드 차량인 만큼 뒷좌석이 더욱 눈에 띄도록
앞좌석보다 뒷좌석이 높고 바깥쪽으로 향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으로 인해 워런 위원회와 하원 암살소위원회가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오스왈드가
쏜 단발이 
케네디와 코널리 주지사에게 총 일곱 군데의 총상을 입혔다고 발표한 이유다.



참고로 올리버 스톤의 영화 JFK에서 차용된 제2, 제3의 저격범이 다른 곳에서 케네디를 저격했다는 음모론이
과학적으로 절대 불가능하며 오스왈드가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총상을 입혔다는 명백한 증거는 다음과 같다.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케네디 암살의 음모론을 파헤치기 위해 첨단 소재를 사용해 사람 머리의 물리를
그대로 재연해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인공 인간의 머리를 만들었으며 케네디 암살 당시의 외부 조건과

동일한 탄도 테스트를 한 결과 영화 JFK에서처럼 차량 우측의 펜스 너머에서 케네디의 머리를 저격시켰다면
관통으로 인해 바로 옆에 있던 재클린 여사가 무사할 리 없다는 당연한 탄도 테스트가 나왔다.


 

  

 

 


이어 실제 오스왈드가 저격한 위치로 알려진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과 동일한 위치에서 탄도
테스트를 
한 결과 두개골이 관통되지 않은 채 케네디의 두개골과 동일한 형태로 총상이 생겼으며

혈흔 자국들의 위치와 당시 케네디 차량의 바로 뒤에서 오토바이로 경호하던 바비 하기스가
케네디 저격 순간 두개골 일부가 자신에게 튄 것과 동일한 현상 또한 발견되었다.




이를 토대로 케네디 암살 현장을 촬영한 Zapruder Film과 디스커버리에서 실시한 탄도테스트를
컴퓨터 작업으로 
비교한 결과 오히려 오스왈드가 저격했다고 알려진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의
위치 외엔 알려진 것과 같은 총상을 입힐 수가 없음이 밝혀졌다.





또한, Zapruder Film을 이용해 FAA라는 회사와 Dale Myers라는 애니메이터가 컴퓨터 그래픽으로 당시 상황을
재연한 결과물은 
오스왈드가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저격을 한 것이 맞다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1964년 실시된 FBI 총기 검사에서 오스왈드가 사용한 총은 최소한 재장전에 2.3초 정도가 필요하며

첫발이 이미 장전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가 4.5초 만에 3발의 총을 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역시 1967년 CBS에서 실험한 결과로 의문이 해소되었는데 11명의 실험자 모두
오스왈드가 사용했던 라이플과 동일한 종류의 총을 사전에 다루어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3발의 총을 쏘는데(그중 첫발은 장전상태에서) 4.1초에서 6초 사이라는 결과가
나왔으며 이후 Zapruder Film을 분석한 결과 첫 번째 사격이 조금 더 이른 시기로 추정돼
오스왈드에겐 적어도 5초 이상의 시간이 주어졌을 것이라고 밝혀졌다.




그렇다면 케네디와 코널리 주지사에게 일곱 군데의 총상을 입힌 총알, 즉 증거자료 CE399의 총알이 도저히 사람의 몸을
관통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온전하여 깨끗한 총알(Pristine Bullet)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어떻게 된 것일까?

 

사실 이것 역시 오히려 단발의 총알이 케네디와 코널리 주지사에게 일곱 군데의 총상을 입혔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되는데 
해당 라이플에서 발사된 총알의 속도는 초속 2,000피트 정도라
코널리 주지사의 손목뼈와 부딪혔다면 심하게 일그러져야 
하겠지만, 그전에 케네디의 몸을 관통한 뒤
코널리 주지사의 몸 또한 관통하며 총알의 속도는 절반 이상으로 떨어졌고 
국제 총상 탄도 협회에서
오스왈드가 사용한 것과 동일한 총알로 초속 1,100피트로 실험한 결과 위 사진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참고로 케네디와 코널리 주지사 간의 총격에서 반응에 시간차가 있었던 것은 케네디의 경우 총격 시 충격이
운동신경을 자극하였고 코널리 주지사의 경우 폐를 관통하며 케네디보다 훨씬 느린 반응을 보인 것이라고 한다)

 

또, 케네디와 코널리 주지사를 관통한 마법의 총알은 깨끗한 총알, 혹은 온전한 총알로도
불리는데 
음모론 옹호론자들에 의해 왼쪽의 사진처럼 한쪽 면이 찍힌 사진으로 소개되곤 한다.

 

하지만 사실 이 깨끗한 총알, 즉 증거물 CE399는 결코 깨끗하거나 온전한 상태는 아니다.
(사진 왼쪽의 가장 깨끗한 단면을 찍은 사진이 주로 알려졌으나 그 반대 면을 보면 사실 변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케네디와 코널리 주지사의 몸을 관통한 뒤 손목뼈에 부딪혀 변형은 약하긴 하지만
이 증거물 CE399는 암살 당일 오후 1시 30분에서 2시 사이 경에 케네디가 후송된 파크 랜드
메모리얼 병원에서 근무하던 다렐 톰린슨이 당시 엘리베이터 옆에 
세워둔 들것에서
이 총알을 발견해 시크릿 서비스인 리차드 존센에게 전달하였고 
리차드 존센은 다시
워싱턴에 돌아가 저녁 7시 30분경 상관인 제임스 롤리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임스 롤리가 저녁 8시 50분에 FBI 연구소에 넘겨 주었으며 
이후 FBI 연구소에서
실험을 통해 오스왈드의 이탈리아제 라이플총에서 발사된 것임을 밝혀냈다.
(총알이 총구를 빠져나오며 생기는 나선형의 무늬를 비교하는 방법)

만약 음모론 옹호론자들의 주장처럼 음모에 관련된 배후세력이 몰래 총알을 갖다 논
것이라면 
누가 발견할지도 모를(혹은 발견되지 않을지도 모를) 곳에 갖다 놓은 이유와
케네디와 코널리를 
관통하여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형태의 모양이 된 총알을 준비하기보단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양의 총알을 준비하지 않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또, 달착륙 조작설에서의 성조기 케이스처럼 뻔한 의심을 사려는 이유도 설명되지 않는다
참고로 코널리 주지사의 손목에서 발견된 탄환 조각과 이후 중성자 방사화 분석의 도입으로 인해
오스왈드가 쏜 단발에 케네디와 코널리 주지사가 일곱 군데의 총상을 입었다는 것이 재확인되었다)


마지막으로 케네디가 정말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저격당하였다면
어째서 앞에서 총격을 받은 것처럼 몸이 뒤로 젖혀졌는가?


 


이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적이 있는 물리학자 루이스 알바레즈가
1976년 발표한 제트 효과(Jet Effect)로 
설명할 수 있다.

수박이나 멜론과 같이 딱딱한 겉면과 연한 내부로 이루어진 물체에 총을 쏘게 되면 총알이
관통되어 
나오는 출구가 크게 손상되며 내부의 물질이 외부로 빠져나가는 순간 마치 제트기와
같은 추진력으로 
인해 총알이 오는 방향으로 물체를 밀어낸다는 것이 제트 효과이다.


실제로 멜론, 수박, 백골로 실험한 결과 케네디와 동일하게 총알이 오는 방향으로 물체가 이동했다.


<케네디 암살 당시 오스왈드의 시선으로 어째서 첫발이 아닌 세 번째 발사가 가장 정확했는지를 설명해준다>



정말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발사된 것인가? 그렇다면 'Grassy Knoll'은?

·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전방에서 발사된 총알에 암살되었다는 증거는 정말 가능성이 없는 것일까?


· 먼저 이러한 가설엔 치명적인 오류가 존재하는데 당시 퍼레이드에 사용된 차량 전면부에
  운전석과 조수석에 
탑승한 시크릿 서비스 요원들은 물론 뒷좌석의 코널리 주지사 부부와
  케네디 부부를 커버할 높이의 차량 유리가 존재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 그렇다면 전방에서 총알이 발사되었다는 가설을 전제로 할 시 애초 이러한 차량 전면부의 유리와
  케네디 앞좌석에 
앉은 4명의 인원에게 어떠한 총상도 입히지 않고 케네디의 머리를 적중시키려면
  차량을 기준으로 전면부가 아닌 각도상 
사선에서 저격해야만 했을 것이다
  (게다가 케네디가 머리를 저격당했을 때엔 그전의 총격으로 목을 움켜쥐며 고개를 다소 숙인 상태)


 

· 
이 사진은 암살 당시의 차량 전면부 유리에 생긴 균열인데
  분석 결과 유리 안쪽의 충격에 의해 생긴 것으로 밝혀졌다
  (전방의 총격으로 균열이 생겼다면 관통되었거나 총알이 이 균열
  위로  
지나가며 이같은 상처를 남겼다는 가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 
먼저 차량을 기준으로 좌측에서 총알이 발사되었다는 가설을 보면,
  이 사진과 같이 전혀 엄폐할 곳이 없으므로 저격이 불가능한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앞서 말한 차량 전면부 또한 당연히 엄폐할 곳이 없음을 알 수 있다)




· 그래서 총이 전방에서 발사되었다고 주장하는 음모론자들이 만들어낸 가설이 'Grassy Knoll'인데
  바로 차량을 기준으로 우측에 있는 작은 언덕 펜스 너머에서 케네디를 저격했다는 가설이 그것이다
  (이 음모론은 사실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의 가장 대표적인 음모론이다)




· 하지만 이 가설대로라면 케네디 앞좌석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총상도
  입히지 않고 저격에 성공하기 위해 이러한 각도가 되어야 한다

· 
그러나 당시 Grassy Knoll에서 발사했을 가능성이 제로인 
이유가 있는데,

  바로 해당 언덕의 높이와 각도에서 발사했을 시 목에 총상을 입은 케네디
  곁에 있던 
재클린 케네디가 어떠한 총상도 입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디스커버리 채널의 실험을 통해서도 Grassy Knoll 가설을
  테스트한 결과 
재클린 케네디가 아무런 총상 없이 무사할 수 없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 마지막으로 당시 사건을 가장 먼저 조사했던 FBI, 그리고 공식위원회인 워런 위원회,
  또 이들을 믿지 못했던 하원 암살소위원회 모두 
오랜 기간의(FBI는 제외) 분석에서
  모두 케네디가 뒤에서 총격을 
받았다고 결론지었으며 특히 마지막까지 밝혀지지 않은
  명백한 음모가 
있다고 주장한 하원 암살소위원회조차 오스왈드가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케네디를 절명시킨 것은 확실하다고 결론 내렸다



· 물론 케네디의 두개골 X레이 등을 검시한 법의학자와 병리학자들

  모두 케네디가 뒤에서 총격을 받았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렇다면 리 하비 오스왈드의 혐의는 얼마나 정확할까



· 사격솜씨가 형편없었다고 알려진 것과 다르게 그는 해병대 복무 중인 1956년 12월,
  200야드 떨어진 목표물에 
총 50발의 사격을 실시해 49발을 명중시켰다
  (케네디 암살 당시 거리는 약 80야드)


·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발견된 라이플의 탄피 3개가 오스왈드의 라이플 것임이 밝혀졌으며
  그가 암살에 사용한 라이플을 주문한 것이 확실하게 밝혀짐과 함께 총에서 손바닥 지문 일부가 발견되었다



· 비록 그가 암살에 사용한 총을 들고 있는 사진이 출판과정에서 총 부분을 선명하게 수정하느라 조작의혹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1963년 3월 20일부터 4월 24일간에 살던 집 뒷마당에서 자신이 살던 셋집의 부인에게
  노동자와 투쟁이라는 신문과 암살에 사용된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 교통경찰관 JD 티피트를 권총으로 살해하는 것을 7명이 목격했으며 현장에서
  체포 당시 그가 소유하고 있던 
권총에서 발사된 탄피가 발견되었다




· 케네디 암살 당시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의 직원들은 위층에서 총알이 발사되는 소리를
  들었으며 
암살 바로 직후 유일하게 무단으로 사라진 직원은 오스왈드뿐이며 그의 가정부는
  그가 황급히 집에 
들어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뒤 수분 후 다시 집을 나갔다고 증언했다


· 그가 케네디를 암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부인은 오스왈드가 라이플총을 담요로 쌓아 차고에
  넣은 것을 
알았기에 곧장 차고로 가 확인한 결과 담요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남편이
  암살범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후 경찰의 수색에서 남편의 총이 차고에 그대로 있으므로 범인이
  아니라고 경찰을 차고로 
데려가 담요를 보여주었지만 실제로 담요 안에 총은 없었고 그녀는 자신이
  미처 담요 안을 확인하지 않았음을 
알고는 남편이 암살범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 케네디 암살 직후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 창문에서 총을 내밀고 케네디를 저격하는 암살범을
  목격한 HL 브레난은 곧바로 그의 인상착의를 신고했고 이후 오스왈드가 맞음을 증언했다



그의 정체는 무엇이며, 어째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한 것인가



· 그는 굉장히 복잡한 사람이며 변덕이 심한 사람이었다, 해병 복무 당시 동료 살해 혐의와 불법 총기
  소지 및 발사 죄명으로 군법회의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가 하면 냉전 시대에 미 해병임에도 소련의
  공산주의(정확히는 마르크스 주의)를 동경하는 등의 기행을 보이며 결국 불명예제대를 하게 되었
  이후 일본 아츠기 기지에서 복무할 당시 배운 러시아어로 소련에 여행을 가 그대로 망명하였다


· 망명 당시 그는 미국의 스파이로 의심받아 추방되는 것을 피하고자 자살시도를 한 끝에 소련
  당국으로부터 
민스크에서의 생활을 허용받았고 TV 공장에서 일하며 소련 여성인 마리나와 결혼했다



· 소련에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밝히며 모스크바 미국 대사관에 여권을 반납하고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려고 했으며(이로 인해 이후 그가 CIA의 스파이여서 첩보 활동을 위해 위장을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후 생각을 바꾸고 마리나와 딸을 데리고 1962년 미국에 귀국해 달라스 지역에 거주한다


· 1963년엔 우익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이며 2월에 'Operation Midnight Ride'라는
  반공산주의 여행에 대해 전도자들에게 협력하기로 하며 신문 일면을 장식한
  에드윈 앤더슨 워커 육군 소장을 표적으로 삼고 그를 감시하기 시작한다




· 그는 1월 통신주문을 통해 권총을 주문하는데 이어 라이플총을 주문하기에 이르렀고 직장에서 해고된 10일
  후인 
4월 10일 에드윈의 자택 부근 교회에서 예배를 하여 혼잡한 것을 파악하여 이날을 암살 계획 날로 잡는다


· 그러나 약 30m 거리에서 사격한 오스왈드의 총알은 창문으로 인해
  그 궤도가 벗어나며 에드윈의 팔뚝에 
부상을 입히는 것으로 끝난다.


· 당시 수사 당국은 에드윈 암살 미수범에 대해 파악을 하지 못했으나 이후 오스왈드가
  자신이 체포될 경우를 
대비해 아내에게 남긴 러시아어 메모 외에 자신의 계획을 적은
  메모를 발견한 아내 마리나가 남편이 또다시 
사람을 죽이려 할 때 경찰에 제출하고자
  자신의 요리책 속에 숨겨둔 것이 케네디 암살 후 집안 수색과정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참고로 오스왈드가 케네디 암살 당시 사용했던 총알과 에드윈 암살 미수 사건 당시의
  총알을 중성자 방사화 분석 
한 결과 동일한 제조 업체에서 판매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 한편, 에드윈 암살에 실패한 오스왈드는 뉴올리언스로 거주지를 옮긴 뒤 카스트로
  지원 단체인 
쿠바 공정위원회에 참가하여 삐라를 배포하다 체포되기도 하였다

 
 


· 1963년 9월 27일엔 멕시코에 가 소련 대사관과 쿠바 대사관을 방문해 미국의 정보를
  미끼로 
망명을 요구하나 상대되지 않았으며 이후 카스트로 지지자로 활동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반카스트로파의 활동가들과 자주 만나는 등의 모순된 행동을 보였다


· 그는 자주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그만두면서 결혼 생활은 거의 파탄 나 일없이 무일푼인 상태였다고 한다


· 그가 케네디를 암살한 이유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데 공산주의에 매료되어 있었으며 카스트로
  지지와 반카스트로파 또한 지지하며 이에 공통된 적대감을 받는 케네디가 에드윈 암살에 실패하였고
  불안정한 현실에 처해있던 오스왈드에게 좋은 표적이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 한편, 케네디 암살의 음모를 다룬 올리버 스톤의 영화 JFK의 이야기를 제공한 짐 개리슨은
  오스왈드가 
양성애자이며 완벽한 사람인 케네디를 시기해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잭 루비, 크레이 쇼, 페리 모두가 동성애자였으며 이들이 오스왈드와
  함께 완벽한 남자인 
케네디를 시기해 암살을 계획했다고 주장했다)


· 어떻게 생각하면 어떠한 집단에 속하여만 안정을 취하는 그가 여러 곳으로부터 정착을
  하지 못한 채 정신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되도록 유명인사를 암살하는데 열중했을지도 모른다,
  알다시피 미국의 경우 정상인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유명인사의 암살기도를
  하는 것은 영화에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아니다



<체포되면서부터 경관의 폭행을 강조하며 언론을 향해 '나는 희생양입니다(I am patsy)'라고
끊임없이 주장한 리 하비 오스왈드, 
물론 일부 음모론자들은 그가 최소한 케네디 암살
반년 전 이미 한 번의 암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은 배제한 채 그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한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과 음모론



케네디 암살과 관련한 음모론은 사건 직후부터 여론을 통해 형성되었지만, 본격적인 세부
사항들이 대중에 알려진 계기는 
케네디가 암살당한 곳이 관광명소가 되며 가판대에서 노점상을
하며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음모론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들과 음모론 옹호론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이 워너 브라더스사의 지원을 받아 
5천만불과 케빈 코스트너, 게리 올드만 등의
쟁쟁한 배우들을 섭외해 JFK라는 영화를 공개하고서부터일 것입니다.

이 영화의 여파가 얼마나 컸는지 미국인의 74퍼센트가 케네디의 암살에 음모가 있다고 믿게
되었으며 
여론의 압박에 의해 케네디 암살과 관련한 대부분의 문서를 공개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올리버 스톤의 영화 JFK가 뉴올리언스 짐 개리슨 지방검사를 모델로 하여
그의 음모론을 완벽히 차용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비난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영화 속에선 매력적인 케빈 코스트너가 홀로 거대권력의 부패, 그리고 음모에 맞서 정의롭게
싸우는 것으로 
표현되었으나 영화 속 케네디 암살과 관련한 음모론들은 대부분이 조작과
오류투성이며 극 중 케네디 암살에 
직접적인 관여를 한 인물로 크레이 쇼를 법정에 내세우는데
실제로도 그는 크레이 쇼를 케네디 암살범으로 몰아 
법정에 세우며 최초로 케네디 암살과 관련한
법정이 열리게 되었지만(오스왈드는 법정에 서기 전 암살되었음) 
결국 억측을 편 짐 개리슨이
승소하지 못하고 크레이 쇼의 무죄가 입증되어 수백만불에 대한 손해 배상을 
청구받을 위기에 처하지만,
판결이 나기 전 크레이 쇼와 그의 모친이 사망하며 부모나 자식이 없는 상태라 
법에 따라 소송이
진행되지 못하며 아무런 배상금도 지불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한편, 크레이 쇼는 4년간의 법정 투쟁 때문에 전 재산을 쏟아 부어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음모론자들도 짐 개리슨을 탐탁지 않게 여겼는데 그것은 그가 생전 너무도 많은 증거를
조작했으며 
케네디 암살과 관련해서도 계속해서 말이 바꾸며 결국엔 범인이 맨홀 위에 서 있던
자였고 암살을 위해 퍼레이드에 
참여한 범인이 16명으로 늘어나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짐 개린슨의 음모론을 바탕으로 JFK라는 영화를 만들어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받은 올리버 스톤이 
짐 개리슨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는지, 아니면 그의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기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영화를 실화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결국 미 정부는 케네디 암살 관련 문서를 공개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영화 오프닝에 '저항해야 할 때 침묵하는 행위가 비겁자를 만든다'라는 문구와
오스왈드를 죽어도 아무도 눈물 흘려주지 않는 가련한 희생자로, 
그리고 케네디
암살 사건을 햄릿에 비유하며 아버지를 죽인 자가 왕위를 빼앗았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짐 개리슨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믿었던 것 같다)

이후 비록 음모론 옹호론자들이 못 본 척 외면하지만 어찌 됐든 케네디와 관련한 300만여 페이지의
문서가 사건 기록 검토위원회에 의해 모아졌고 CIA, FBI 등의 정부 기록 또한 만여건이 넘는 파일이
공개되어(아쉽게도 음모론 옹호론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파일은 
없었지만) 케네디 암살 직후
소련과 쿠바의 연관성을 의심해 악화되는 여론에 오히려 그들과의 관계가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을까봐
부담스러웠던 정부의 서두른 단독범 여론형성과 베트남전 철수를 계획했던 케네디와 반대로 
적극적인
참전에 나서는 등과 같이 음모론들이 실제로 벌어졌던 60년대의 어두웠던 모습이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음모론 옹호론자들과 음모론 팔이들, 그리고 올리버 스톤으로 인해 여론이 형성되었으므로 2017년에
공개되는 
케네디와 관련한 모든 암살 기록들이 엉뚱한 핑계 위로 증발해 버리는 일은 일어나기 힘들 것입니다.
(92년 암살기록검토위원회법에 따라 종전의 2039년에서 2017년으로 공개 시기가 앞당겨짐)
 
그리고 전 세계 음모론 중 한밤중에도 깨어 있게 만들 5%의 음모론 중 하나인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이 이제는 음모에 관련된 자들을 한밤중에도 깨어 있게 만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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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문헌: 위키백과
                The Kennedy Assassination By John Mcadams

[이상한 옴니버스] 서른 세 번째 화,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과 마법의 총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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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푸키멀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