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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29. 08:58

광주 출신 연예인들 카테고리 없음2012. 12. 29. 08:58














광주 출신 연예인들





 
 

















독재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마음만큼

아름다운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광주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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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푸키멀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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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푸키멀더
2012. 12. 22. 15:12

한비자의 한구절 카테고리 없음2012. 12. 22. 15:12

한비는 스승인 순자의 유물론적 세계관을 토대로 하여 인간을 본질적으로 이 지향적인 동물로 파악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이해가 서로 엇갈려 모순 대립한다. 그것은 결코 사랑과 미움 때문에 일어나는 반목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공리적인 치밀한 계산에 의하여 전개되는 일종의 투쟁상태다. 여기서 그는 시시비비, 즉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가치평가를 일체 배제하고 오로지 진이냐 위냐 하는 사실인식만을 문제삼았다. 우리가 서로를 친애하는 소박한 심정은 이해타산앞에 무력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의리나 명분이 실리와 얼마나 괴리되는가를 강조하고 있다. 
"수레를 만드는 여인은 사람이 모두 부귀해지기를 바라고 관을 짜는 장인은 사람이 일찍 죽기만을 기다린다. 이는 여인이 더 선하고 장인이 더 악해서가 아니다. 사람이 부귀해지지 않으면 수레가 안팔리고 이와 반대로 사람이 죽지 않으면 관이 팔려 나가지 않는다. 정녕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라 사람이 죽는데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종사하는 일이 어떤 성격이냐에 따라서 이득과 손해보는 계산이 서로 다르다.이해타산이 결과적으로 사람을 선한쪽으로 가게 하기도 하고 악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비는 한걸음 더 나아가 부모와 자식 사이도 이해가 서로 상치되는 모순관계로 파악하였다. 
"아들을 낳으면 좋아하고 딸을 낳으면 싫어한다." 
"후비나 부인이나 태자는 군주가 빨리 죽기를 바란다. 군주는 자신의 죽음을 이로 취할 수 있는 자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정치권력이 갖는 속성이란 참으로 비정하고 냉혹한 것이어서 부자간에도 사사로운 정을 허용할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더군나 부부 사이는 골육지친이 아니다. 양쪽의 이해가 일치되지 않을 경우 그 갈등은 한층 심각해지는 법이다. 
"군주는 작위를 내걸고 신하는 재능을 들어 보인다." 
"위험한 전쟁에 복숨을 걸고 군주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읁 후한 은상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군신관계 역시 의리로 맺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마치 주인과 고객간에 서로 팔고 사는 상거래나 같아 철저한 계산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한비의 철학체계는 한마디로 통치공학적 논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해관계의 상호모순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특히 신하를 통제 관리할 때 군주가 취할 기본적인 자세를 밝혔다. 군주는 추호도 신하를 은애하는 마음을 길러서는 안 되며 끝까지 위엄을 보여야 된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한비가 인간의 애정이나 의리 자체를 경솔하게 부정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현실적으로 사랑보다는 힘(권력)의 논리가, 다시말해서 의보다는 이가 앞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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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20,30대에 한비자 읽을때는 공감의 정도가 약 50%을 넘지 않았는데 40대인 지금은 거의 80~90%에 대하여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 나이 몇살 더먹으면 제 인생 최고의 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51.6%가 새누리 지지한것은 자기한테 이익이 되는 세력이 새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역사를 들여다 보다 진보가 이기는 게임보다는 보수(기득권)이 이기는 경우가 훨씬 많아서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미국만 봐도 공화당이 훨씬 집권하는 기간이 길잖습니까. 
일본은 자민당 일당(물론 타당과 연립하였지만요) 독재하다 요 몇년 민주당이였고요. 
그리고 새누리에 얼마나 머리 좋은 사람들 많아요. 출세하려면 보수(기득권)에 줄을 서야 하기 때문에 운동하던 사람들도 새누리로 가잖아요. 

언젠가 노무현 대통령도 본인이 집권하게 된것은 천운이였다는 말을 했던걸로 기억됩니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였던 거죠.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패배주의가 더할지도 모르겠고 지금보다 단기적으로는 더 나빠질 가능성이 높지만 결국 역사는 항상 발전해 왔듯이 좋은 방향으로 가겠죠. 
근데 우리세대에 좋아질지는 확신을 못하겠네요. 어쩌면 자녀세대나 아니면 손자세대이후가 될지도 모르죠. 

하지만 항상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백년전쟁을 보니 그 오랜 투쟁기간동안 진보가 10년 집권했군요. 그리고 다시 보수의 10년 집권 앞으로 5년 다들 열심히 현업에서 생활하시고 또 다른 희망을 키워 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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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푸키멀더
2012. 12. 20. 10:35

Progress and Poverty 카테고리 없음2012. 12. 20. 10:35


부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는 오히려 악화된다. 
(중략)


부패한 민주정에서는 언제나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이 돌아간다. 
정직성이나 애국심은 압박받고 비양심이 성공을 거둔다. 
최선의 인물은 바닥에 가라앉고 최악의 인물이 정상에 떠오른다. 
악한 자는 더 악한 자에 의해서만 쫓겨날 수 있다. 
국민성은 권력을 장악하는 자, 그리하여 결국 존경도 받게 되는 자의 특성을 점차 닮게 마련이어서

국민의 도덕성이 타락한다. 
이러한 과정은 기나긴 역사의 파노라마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 되면서,

자유롭던 민족이 노예 상태로 전락한다. 
(중략)


가장 미천한 지위의 인간이 부패를 통해 부와 권력에 올라서는 모습을 늘 보게 되는 곳에서는, 
부패를 묵인하다가 급기야 부패를 부러워하게 된다.


부패한 민주정부는 결국 국민을 부패시키며, 국민이 부패한 나라는 되살아날 길이 없다. 
생명은 죽고 송장만 남으며 나라는 운명이라는 이름의 삽에 의해 땅에 묻혀 사라지고 만다. 

-헨리 조지(Henry George)가 지은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 중에서

 

이번 대선에서는 졌지만.... 우리 모두 부패를 부러워하지 말고, 우리의 도덕성을 타락시키지 말고, 정직성하고 애국심을 가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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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푸키멀더
2012. 12. 18. 12:12

이자벨 아자니 카테고리 없음2012. 12. 18. 12:12



이자벨 아자니 1955년 6월 27일 프랑스


18세


22세


30세


43세












49살


51살


53살


55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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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푸키멀더

No.1 Beautiful Woman in the world all of time is Isabelle Yasmine Adjani

No.1 top most beautiful woman in the world all of time is Isabelle Yasmine Adjani.She is a French film actress and singer.

Isabelle Adjani


Isabelle Adjani


Isabelle Adjani


Isabelle Adjani


Isabelle Adjani


Isabelle Adjani



Isabelle Adjani


Isabelle Adjani


Isabelle Adjani


Isabelle Adjani


Isabelle Adjani


Isabelle Adjani


Isabelle Adjani


She received two Academy Award nominations for Best Actress. She performs in French, English, and Ge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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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푸키멀더
2012. 12. 7. 14:31

안동권씨 권노갑 카테고리 없음2012. 12. 7. 14:31

 권노갑 그는 누구인가 ?

 뿌리찾는 권노갑

 

81세 최근의 권노갑 

 

 권노갑에 의해서 정치인이 되고 국회의원이 된 정동영,

정동영에 의해 숙청된 권노갑 그는 그래도 배신자 정동영과 악수한다 

 

 

권노갑은 경북 안동 출신!!!!!!!!!!!!!!!!!!!~~~~~~~~~~~

 

이름 : 권노갑 (權魯甲)

출생 : 1930년 2월 18일

학력 : 목포상업고등학교 - 동국대학교

약력 : 1959년 목포여고 영어교사 1963년 김대중의원 비서관 1993년 민주당 최고위원 1999년 국민회의 상임고문 2000년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 

 

 1987년 평민당 대선후보로 유세중인 김대통령 권노갑“ 나 뿌리는 안동이랑께” 경북 도대회서‘母川回歸’역설 …‘김대중 대통령만들기’ 문중에 손짓 국민회의의 권노갑(權魯甲)의원은 12월 14일 경북도지부 개편대회에서 자신의 개인사를 이렇게 정리했다.

 

 무슨 말일까. 『저 권노갑의 뿌리는 경북 안동입니다. 돌이켜 보면 제가 걸어온 길은 연어의 일생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원해서, 연어의 회귀본능처럼 저의 뿌리이자 부모의 고향인 사랑하는 경북에 돌아왔습니다』 자신이 안동권씨이고, 부모의 고향이 경북이기 때문에 「연어의 모천회귀」 라는 것일까.

 

 틀린 말은 아니다. 권의원의 「모천회귀」에는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깊고, 「상상하기 어려운 사연」이 숨어있다.  김대중총재의 분신(分身)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동교동계의 상징」으로 알려진 권의원이 자기 뿌리를 찾은 것은 1988년 13대 총선 직후. 권의원이 1930년생이니까 자기 나이 59세, 그러니까 환갑이 다 돼서야 자기 뿌리를 찾은 것이다.

 

 권의원은 그리고 1년 뒤인 1989년, 우리 나이로 60세가 돼서야 자기 집안이 안동 권씨 무슨파(派)에 속한 집안인지를 알게 된다. 家乘譜로 핏줄 확인… 종친회서 祭主 인사도 올려 권의원이 평소에도 잠시 말을 잃고, 허전해 하는 대목이다. 『아버님은 원래 안동에 사셨는데 언젠가 경북 북부에 가뭄이 심하게 들자 목포로 이사해 기름공장을 차렸어요. 하지만 아버님은 내가 네살 때 작고하셨고, 어머님이 대학 2학년 땐가 6·25가 나던 해에 무슨 예감이 드셨는지 가승보(家乘譜)를 주시면서 「어디를 가더라도 이것만은 꼭 지니고 다녀라」하고 당부하셨어요』 결혼할 때 쓰던 함 속에 「신주단지」처럼 모셨지만 권의원은 그러나 김대중총재를 따라 민주화투쟁 하랴, 감옥에 가랴, 도망 다니랴 하면서 뿌리찾기 할 엄두를 못냈었다.

 

 정치상황이 조금 나아진 6월항쟁 이후 안동권씨로 민추협을 같이하던 권오태(權五台)전의원을 찾아가 가승보를 건네주며 『족보를 한번 짚어봐달라』고 했지만, 「권치삼」으로만 알고 있던 부친 이름이 「권덕수」로 올라있어 뿌리찾기에 실패하고 만다.

 

 권의원의 뿌리찾기가 이뤼진 날은 13대 총선일인 88년 4월26일 자정경. 목포에서 개표방송을 보고 있던 권의원의 부인은 방송에서 권의원을 「당선 확실」로 보도하던 시간, 경상도 사투리의 시외전화 한통을 받는다. 『거기가 노갭이 서방님댁 아인교, 노갭이 서방님댁 맞지예』 어릴적 목포 집에서도 잠시 살았다는 대구의 사촌형수가 개표방송을 보다 전화를 한 것이다.

 

 얼마 뒤 대구에 내려간 권의원은 평소 지니고 있던 가승보와 안동 권씨 족보를 대조, 자신이 안동 권씨 급사공파(級事公派)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경북 칠곡에서 조상들께 「제주」(祭主)로서 인사를 올리게 된다. 같은 안동 권씨인 권정달(權正達)의원이나 권오을(權五乙)의원이 지 금은 모두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지만 당시만 해도 권정달의원은 낙천하고, 권오을의원은 정치지망생이었기 때문에 「국회의원 권노갑」이 제주(祭酒)를 올린 것이다. 권의원의 「모천회귀」에는 그런 개인사만 있는게 아니다. 알에서 부화한 연어가 바다로 떠나지만 「살아남은 연어」만이 다시 모천회귀 하듯, 그런 생명력으로 대구 경북에서 「대통령 김대중」의 꿈을 일궈보겠다는 것이다.

<김 창 혁 기자>

 

 

김대중은 과연 권노갑을 버릴 수 있나 - 오마이뉴스

 

권노갑은 1930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했다(72세). 이 지역의 명문인 안동권씨 가문 사람이다. 부친이 안동에서 농사를 짓다 목포 개항 때 이주해 사업을 했는데, 식용유 공장을 운영했다고 한다. 

디제이의 최측근 권노갑이 경북 출신이라는 것은 한국의 후진적 정치풍토에서 보면 의미심장하다. 반호남이라는 패권적 지역주의의 수렁에 빠진 디제이의 약점을 보완해 주는 측면이 있다.

권노갑의 취미는 운동이다. 실제로 권노갑은 "어린 시절부터 공부보다는 운동에 관심이 있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야구와 농구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173cm라는 당시로서는 비교적 큰 키를 가진 그의 농구 포지션은 '포워드'였다. 그리고 그는 지난 40년 동안 정치 경기장에서 '디제이의 포워드'로 뛰었다), 유도와 복싱은 전라도 대표선수로 활약했을 만큼 수준급이었다고 한다. 

디제이는 목포상고를 수석으로 입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디제이는 학벌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류대를 나온 또 다른 김 씨와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지적 수준을 국민들에게 보여준 바 있다. 수천 권의 책을 읽었다는 '똑똑한 정치인' 디제이에게 권노갑의 단순할 정도로 우직한 뚝심은 소중한 자산이었을 것이다. 권노갑은 취미마저 디제이의 보색(補色) 역할을 해주고 있다. 보색이란 옆에 있는 색을 더 돋보이게 해주는 색을 말한다. 

권노갑이 디제이의 목상(목포상고) 4년 후배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초등학교(목포북교) 때부터 선후배 사이였다. '똑똑한 선배' 디제이에게 매료 당했던 권노갑은 1961년 인제 보궐선거에 출마한 디제이의 선거운동원으로 결합했다. 디제이의 정치인생 45년(1956년 민주당 입당 기준) 중 무려 40년을 동고동락한 후배이자 동지였다. 

권노갑의 디제이에 대한 '충성심'은 절대적이다. <대통령을 만든 사람들>에 실린 회고기에서 그는 "죽어서도 '충성' 그 하나로 대통령을 모신다는 각오로 오늘까지 왔다" "나는 지금껏 김대중이라는 인물과 동일한 생각과 사고로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더욱이 그는 <논어> 위령공편에 나오는 '무구생이해인(無求生以害仁) 유살신이성인(有殺身以成仁)'이라는 대목까지 동원해 김대중을 '절대적 존재'로 추앙했다. 이 말의 뜻은 "삶을 구하여 인을 저버리지 않으며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을 이룬다"는 것이다. 권노갑에게 디제이는 '인'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 말보다 주군(主君)에 대한 가신(家臣)의 절절한 충성심을 잘 드러낸 것이 있을까? 

권노갑은 1963년 디제이가 의원에 당선된 뒤 정식으로 국회에 등록한 '김대중 의원 비서'가 되면서 디제이의 '정치적 분신'이 된다. 그는 1987년 김대중 평민당 총재 비서실장, 1991년 김대중 신민당 총재 특보, 1995년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비서실장으로 활동했다. 

권노갑이 자식들에게 "내 묘비명에 단 한 줄, '김대중 씨의 비서실장'이라는 말만을 적어달라"고 말했다는 것은 유명하다. 1999년에 냈던 책 이름도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는 삶이 아름답다-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한 40년>이었는데, 실제로 권노갑은 디제이가 고난의 길을 걸을 때 항상 그 옆에서 '버팀목' 역할을 했다. 

박정희, 전두환 등 군사정권의 최대 정적이었던 디제이에게 언제라도 비수가 되어 돌아올 수 있는 '조직'과 '자금'을 관리한 것이 바로 권노갑이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그는 나름대로의 생존술을 터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음은 권노갑의 술회. 

"그 생존술 중의 하나가 수첩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것이었다. 웬만한 전화번호 2백여 개 정도는 외우고 있었으며, 암기되어 있지 않은 전화번호는 전화번호부 책을 이용했다. 더구나 경리장부를 갖는다는 것은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웬만한 것은 모두 머리 속에 넣고 다녔다. 수첩이나 장부가 빌미가 되어 고문을 해대면 아무리 암호문이라도 불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었다."(<대통령을 만든 사람들> 42쪽)

덕분에 권노갑은 사람 이름이든 전화번호든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해 주었고, 그것은 다시 '조직의 귀재'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비결이 됐다. 권노갑은 디제이가 그런 자신에게 "자넨 참으로 독특한 능력을 가졌어"라고 격려하면서 '인명사전'이란 별명을 지어준 것을 자랑스럽게 회고한 적도 있다.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권노갑이 '한보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된 것도 어찌 보면 그가 디제이의 정치자금을 담당한 업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디제이 의중을 가장 정확히 읽을 줄 아는 측근'이 된 권노갑은 언론이 붙여준 수많은 별명을 가지게 된다. '김대중 대리인' '동교동의 금고' '동교동 맏형' '노갑이 형'(혹은 '노갑이') '권부' 등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노갑이'라는 애칭 때문에 성이 노씨 아니냐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권부'라는 말은 '권 부총재'의 줄임말이다. 

'김대중 대리인'과 '동교동 금고'로서의 권노갑의 면모는 앞에서 살펴봤다. 그렇다면 '동교동 맏형'으로서의 권노갑은 어떤 인물인가. 동교동은 '동교동 178-1번지'라는 행정구역 명칭을 뛰어넘어 상도동과 더불어 한국정치의 1번지라는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이곳에서 '정치식객'으로 상주하면서 정치인 디제이를 온몸으로 옹위한 사람들을 '동교동계 가신'이라고 일컫는다.

동교동계 가신그룹 계보에는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60년대 결합), 설훈, 남궁진, 최재승, 윤철상, 이석현, 배기선, 배기운(80년대 결합) 등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최근 권노갑, 김옥두, 남궁진, 윤철상 등의 구파와 한화갑, 설훈, 배기선, 배기운 등의 신파로 갈리면서 모양새가 구겨지기는 했지만, 최근까지 권노갑은 명실상부한 디제이 가신그룹의 '맏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에 로비를 하려는 사람들, 한자리 얻으려고 기웃거리는 군상들이 권노갑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자명하다. 자의든 타의든 권노갑은 디제이의 권력의 후광(後光)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게 돼 있다.('후광'은 디제이의 호(號)이다) 권노갑의 별칭 중의 하나인 '권부'(權副, 권 부총재의 줄임말)의 의미도 서서히 권부(權府, 권력의 심장부)로 인식돼 갈 수밖에 없었다. 

권노갑은 인사문제 등 각종 권력형 비리와 관련해 끊임없이 구설수에 올랐다. 그럴 때마다 그는 결백과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적었다. 실제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대통령과의 40년 인연 동안 단 한번도 의견이 어긋난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작은 예로, 당직자 인선 때나 선거 공천 심사 때도 대통령은 내 의견을 인정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 대통령께 어떤 일을 문의하면 일단, '권 의원에게 가서 상의해 보시오'라고 말씀하셨을 정도였다." 

비리의혹, 인사개입, 비선라인 독점 등의 사실관계와 상관없이 권노갑이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쇄신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여기게 하는 대목이다. 공인(公人) 권노갑과 관련해 제기되는 공적인 문제는 결코 사인(私人) 권노갑의 개인적 양심의 호소만으로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물론 권노갑은 정권교체 이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에게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무엇인가를 보상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말을 즐겨해 왔다. 

그러나 정권교체 이후 권노갑은 각종 '명예'를 '보상'받았다. 경기대 명예경제학박사(1998년), 동국대 명예정치학박사(1999년), 미국 페어리디킨슨대 명예경제학박사(2000), 제주대 명예경영학박사(2001), 자랑스러운 목포상고인(2000), 자랑스런 동국인상(2001), 마틴루터킹 인권평화상(2001)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상복(賞福)이 어찌 권부(權府)로서의 그의 정치적 위상과 무관하다 할 것인가. 

권노갑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동락(同樂)을 위해 그 분과 반평생을 동고(同苦)하지는 않았다. 다만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이 나라를 위해 반드시 훌륭한 일을 해 내리라는 믿음과 평화적인 정권교체의 염원으로 그 어려운 세월을 참고 견디며 살아왔다. …(중략)… 이제 우리의 염원대로 평화적인 정권교체도 이루었고, 대통령으로서 그 분이 뜻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다만 대통령이 우리들의 선생님만이 아닌 국민의 대통령으로서 뜻을 펼칠 수 있도록 음지에서 도와야 한다. 사실 그것이 우리가 그 어려운 세월을 담보로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일이 아니겠는가."(<대통령을 만든 사람들> 50∼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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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푸키멀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