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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리 음악 소풍' 때문에 베토벤의 음반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이번 주말 예정인데, 실은 사회학자 김종엽 선생에게 '모짜르트 소풍'을 부탁하였으나 원고 사정으로 연기되고 내가 대신 맡은 것이다. 이 일도 원래는 음악평론가 강헌 선생의 몫이었으나 그는 지금 세브란스 중환자실에 있다. 

대책없이 떠맡고 나서 베토벤 음반을 정리하던 중인데, 아뿔싸,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7월 6일, 모친의 고향인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서 숙환으로 별세한 그는 역시 슬로베니아 출신인 아내의 묘지 옆에 지난 10일 안장됐다고 한다. 향년 74세. 

그리하여 몇 자 적는다. 

▲ 지난 7월 6일 사망한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
클라이버를 위하여 세 사람이 필요하다. 먼저 그의 대척점에 있던 카라얀이다. 20세기 후반의 클래식에 있어 '카이저'의 칭호를 받을 만한 카라얀의 생애는 확실히 은둔자 클라이버와 거리가 있다.

카라얀은 클래식이 20세기 전반기의 '실황 연주'에서 세련된 녹음과 '스타 마케팅'으로 옮겨가는 지점을 절묘하게 파악했으며 이를 그 누구보다 최상의 수준에서 활용했던 음악가였다. 그는 수십 대의 카메라를 동원해 자신의 지휘하는 장면을 녹화했으며 최첨단의 스튜디오에서 대중적인 레퍼토리를 수십차례 녹음했다. '클래식=카라얀'이라는 음반 마케팅의 공식을 그는 입증하였다. 

반면에 클라이버는 스튜디오 녹음 대신 연주회장의 라이브를 절대적으로 존중하였다. 그의 음반은 손을 꼽을 정도인데 그중에서도 대부분은 라이브를 녹음한 것이다. 감상자에게는 불과 대여섯 장만 구입해도 되는 뜻밖의 기쁨도 있다. 어쨌거나 그는 조금이라도 빈 틈이 보이면 녹음은 물론 실황 연주마저 취소했으며 음반 산업자와 언론의 관심을 즐기지 않았다. 

▲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명반들
그러나 이러한 차이만으로 클라이버와 카라얀을 대비할 수는 없다. 클라이버가 스튜디오 음반을 전혀 남기지 않은 것도 아니며 카라얀의 명성이 음반 마케팅으로 거저 얻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클라이버가 왜 한사코 스튜디오 녹음을 절제했으며 라이브 연주 또한 최상의 조건이 아니면 자주 회피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두 번째 인물, 그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는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아들은 물론 카라얀에 비해서도 음악사적인 비중이 결코 작지 않다. 다만 그는 멩겔베르크나 푸르트뱅글러처럼 스테레오가 아닌 모노 시대의 지휘자로 현재 들을 수 있는 그의 음반은 상태가 매우 열악하다. 

에리히 클라이버는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 '저주받은 예술가로서의 삶'을 물려주기 싫었던 것이다. 그의 전성기는 다름아닌 히틀러의 전성 시대. 모차르트 오페라에 있어 불멸의 유산을 남긴 에리히 클라이버는 그러나 히틀러 파시즘의 광풍이 몰아치고 예술가에 대한 탄압에 절정에 이른 1935년에 아르헨티나로 망명을 떠났다. 그때 다섯 살이었던 아들 '칼'의 이름을 아버지는 남미식으로 '카를로스'라고 바꿔버렸다. 파시즘에 대한 뼛 속 깊은 저항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차 대전 이후 독일로 돌아왔지만 그의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었다. 대신 카라얀의 시대가 열렸다. 푸르트뱅글러와 에리히 클라이버는 히틀러 파시즘 속에서도 나름대로 지켜온 '독일 음악의 유산'이 카라얀에게 이어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이 지점에서 세 번째 인물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등장한다. 독일 음악 유산의 위대한 상속자인 푸르트뱅글러는 히틀러 시대에 독일에 남았다는 이유로 무대에 서지 못했다. 나중에야 몇몇 기록과 증언에 의하여 복권되지만 그가 베를린 필에 다시 서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기술 발전에 따른 스튜디오 녹음이 서서히 대세를 확보해가는 시절에 푸르트뱅글러는 오로지 '라이브'을 고집하였으며 복권 후 몇 해 동안 베를린 필의 음악적 제사장으로 최후의 명연을 남겼다. 

그럼에도 세상의 운명은 카라얀 쪽으로 기울었다. 1933년에 나치에 입당했고 히틀러의 총애를 받으며 빈 국립오페라극장, 베를린 필 등을 독점하다시피 한 카라얀은 그러나 놀랍게도 47년에 해금되었으며 EMI의 명프로듀서 월터 레그를 만나 전성기를 열었다. 클래식이 '레코딩' 산업과 판촉 활동을 겸한 연주회로 재편될 것을 예견한 월터 레그는 레코딩 전문악단 필하모니아를 설립해 카라얀에게 맡겼고 이후 카라얀은 스튜디오 시대의 황제가 되었다. 

게다가 54년에 푸르트벵글러마저 죽고 말았다. 푸르트뱅글러는 한사코 '히틀러 군악대장'에게 독일 음악의 유산이 이어지는 것을 막고자 했고 에리히 클라이버도 카라얀과 대척에 섰으나 그마저도 56년에 사망하고 만다. 남은 사람은 브루노 발터였으나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콜럼비아 교향악단으로 명연을 남기고는 역시 노환을 이기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카라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1955년에 베를린 필에 입성한 카라얀은 이듬해 '종신' 예술감독직까지 맡아 독보적인 아성을 구축했다. 

그 무렵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취리히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후 아버지 몰래 뮌헨의 3류 극장에서 견습생으로 음악을 배웠다. 아버지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던 무렵에 지휘자로 데뷔한 그는 1974년 독일 바이로이트 음악제를 통해 뒤늦게야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다. 

그는 단 한번 슈투트가르트의 음악감독을 2년 쯤 맡은 것 말고는 평생 동안 상임이나 무슨 감독직을 맡지 않았다. 뮌헨, 빈, 류블랴냐 등의 교향악단과 연주를 했지만 전속은 맺지 않았다. 그는 다만 지휘자였고 음악가였다. 89년에 카라얀이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거론되었지만 정작 클라이버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세상 밖에 머물렀다. 연락이 두절되기 일쑤였으며 거처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의 명성에 비하여 사망한 지 보름 후에나 그 소식이 알려진 까닭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한 베토벤 5번 교향곡
'레코딩을 허락하는 것은 내겐 공포에 가까운 일이다’

클라이버의 말이다. 여기에는 몇가지 뜻이 숨어 있다. 일차적으로는 그의 음악적 취향을 보여준다. 어두컴컴한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 대신 카메라, 마이크, 음향 설비를 대상으로 연주하는 것을 그는 기피했다. 

어쩌면 카라얀을 무의식적으로 의식한 말일 수도 있다. 뛰어난 지휘자이면서도 동시에 정교한 연출자이자 20세기 음반산업의 마케팅 팀장이기도 했던 카라얀에 비하여 어쩌면 클라이버는 19세기에 형성된 서구 클래식의 마지막 정통파로 남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음악의 주술적 요소를 존숭했다는 점. '라이브'가 갖는 일회적인 엄숙성, 피날레가 끝나면 박수에 묻혀 영원 속으로 저장되는 '실황 연주'의 숙명에 대하여 클라이버는 고개를 숙였던 것이다. 

히틀러의 생일 전야제에 불려가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지휘해야만 했던 푸르트뱅글러가 일체의 스튜디오 녹음을 거절한 것처럼 클라이버는 적어도 베토벤에 있어서 '지금 이 순간'의 현장성과 일회성, 요컨대 그 순간에만 존재하고 영원히 소멸하고 마는, 그러나 단순히 '공기의 흔들림'으로 그치지 않고 부채꼴의 연주자와 말굽형의 관객들 사이의 한 정점에 서서, '영원 속으로 소멸'하는 음악적 제의를 집전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그는 맡았던 것이다. 

클라이버의 불가피한 선택은 틀림없이 음악 산업이라는 대세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음악적 가치와 명성은 높아졌으며 은둔할수록 세상은 더욱 그를 원했다. 관습적인 데뷔, 상투적인 레코딩, 상업성이 뻔히 보이는 연주회 등으로 오늘날 클래식 산업은 오히려 사양 산업이 되고 말았는데 그 화려한 패잔병들 틈에 끼지 않고 클라이버는 은둔과 사색의 만년을 선택했던 것이다. 

▲ 라이브 연주의 백미로 꼽히는 클라이버 지휘의 베토벤 4번 교향곡
몇 장의 음반만 남기고 그는 떠났다. 당연히 그가 남긴 것은 몇 장의 음반이 아니라 세속을 거절하고 '20세기의 마지막 예술가'로 버틴 그의 생애다. 바이에른 국립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베토벤 교향곡 4번의 실황 연주 음반은 이채롭게도 제작사인 '오르페오'가 관객의 환호까지 녹음으로 남겼는데, 이제 듣게 될 4악장의 마지막 대목과 열렬한 박수는 고인이 된 카를로스 클라이버에게 이 세속 도시의 사람들이 바치는 가장 경건하고 아름다운 장송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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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푸키멀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