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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말 21번째 국립공원에 등극… 일등공신 박선홍씨

무등산, 光州의 상징으로
일제시대, 6·25로 황폐화돼 안타까웠어… 그래서 무등산 살리기 운동 시작했지
이제 내나이 88세, 평생의 소원 이뤘어

2000년 무렵엔 市에서 반대
당시에도 국립공원 승격운동 벌였는데
市 간부 찾아와 "중앙정부로 넘어가면 市가 할일 없잖아요, 그만두세요" 종용

지난 1일 오전 7시쯤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 자락 증심사 입구. 시민 2000여명이 모여 무등산 국립공원 승격을 자축하고 있었다. 떡국과 주먹밥을 함께 나누며 신년 덕담을 주고받았다.

광주 도심에서 지척으로 바라다보이는 무등산은 광주의 역사와 사람들을 안아온 어머니와 같은 진산(鎭山). 24년 만에 새로 지정된 21번째 국립공원이 됐다. 시민들이 '가슴앓이'를 하는 가운데 지난달 27일 들려온 소식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인사들은 감회가 남달랐다. 특히 이 단체를 이끌며 평생 광주와 무등산 사랑으로 일관한 박선홍씨는 "이제 시민 여러분께서도 긍지를 갖고 앞으로도 무등산을 더욱 사랑하자"고 말했다. 강운태 광주시장은 "이제 국립공원 승격을 계기로 지난날의 아픔을 털고 상생과 도약의 새로운 광주 시대를 열자"고도 했다.

일제가 이 강토를 강점했던 1940년대 초반, 광복 이후, 6·25를 거치면서 무등산은 황폐화하였다. 광주에서 나고 자란 청년 박선홍은 일찍이 "우리의 무등산을 살려야 한다"며 애향 운동과 시민운동의 깃발을 올렸다. 이제 광주 시민의 사랑을 바탕으로 무등산을 푸르게 가꾸었고, 광주의 상징으로 자리하게 했다. 그게 국립공원 승격으로 '공인(公認)'받았다. "이제 제 나이 팔십팔, 평생의 소원을 이루었다"고 말한 박씨를 무등산에서 만났다.

 평생 무등산을 사랑해온 박선홍씨는 “무등산이 이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며 “앞으로 더욱 무등산을 가꾸고 사랑하자”고 말했다. 이미지는 2010년 1월 촬영한 눈 내린 서석대를 배경으로 지난 1일 무등산에서 촬영한 박씨의 사진을 합성했다. / 김영근 기자
"광주가 바로 무등산"

―감회가 깊으시지요?

"생전에 (지정)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무등산을 다니기 시작했지만, 특히 6·25 후에는 산이 참 험했습니다. 일제 때 (억새와 풀까지도) 군용 마초(馬草)로 베느니, 송탄유(松炭油)를 만드느니 하면서 소나무를 마구 벌채해서 황폐해졌어요.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군사용으로 목탄(木炭)을 만들기도 했어요. 그 일제 말기에도 제가 광주시청 계장에게 항의했습니다. 6·25 때는 군사작전을 하면서 산을 많이 버렸습니다. 주민들은 또 아무나 올라서 땔나무를 하고 그랬어요. 숯굴이 도처에 있었고, 산은 벌거숭이가 되었어요. 그런 산이 이젠 푸르게 되었고, 시민뿐 아니라 국민의 사랑을 받는 산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기쁘지 않겠습니까."

―광주 시민들에게 무등산은 어떻게 각별합니까.

"흔히 어머니와 같은 산이라고 하지요. 광주 사람들에겐 신앙의 산이지요. 경관이 빼어나고, 문화가 있고, 역사를 품어온 산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무등산을 보며 춘하추동 계절의 변화를 알았어요. 어르신들이 '무등산에 세 번 눈이 오면 평지에 눈이 온다'고 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보고, 저녁에도 바라보며 '오늘 하루 무사했구나' 위안을 받으며 살았어요. 광주 사람들에겐 광주가 무등산이고, 무등산이 광주입니다."

무등은 '무돌'의 이두음(吏讀音)이다. 습지를 뜻하는 옛말 물들, 물둑, 무들, 무돌을 차자(借字) 표기했다. 지리학 연구자들은 과거 광주 들판이 습지였다고 말한다. 조강봉 우리지명연구회장은 '갈라진 돌'로 풀이한다. 그밖에 무돌을 '무지개를 뿜는 돌'이라거나, 무등(無等)을 '등급과 차별이 없는 산(평등 세상)'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인연이니, 평생인 듯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무등산 얘기를) 자장가로 들었지. 어머니도 절에 다니시니 일 년에 한두 번씩 무등산에 갔어요. 우리 학교 다닐 때 (무등산에 오르는) 순서가 있었어요. 1학년 때부터 광주천, 태봉산(시내에 있었음), 증심사, 약사암, 원효사를 순서로 오르다, 6학년 되면 정상에 가는 거여. 기막히지 않아요? 전통 있는 학교, 예를 들면 광주서중, 서석·수창학교는 학교림이 무등산에 있었어요. 고학년들은 학교림을 찾아가 나무도 심고, 등산도 하면서 산을 가까이 지냈어요."

―산이 (도시와) 가까우니 복이 아닌지요? 그래서 '광주 사람들은 옆 동네 마실 가듯 무등산을 찾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산이 지척입니다. 30분이면 산에 다다릅니다. 150만 도시권에 이런 산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복이지요. 1187m 무등산은 대체로 토산(土山)이어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습니다. 곳곳에 약수가 솟아 산행객의 갈증을 풀어주지요. 산기슭 증심사에서 두어 시간 보행으로 정상까지 오를 수 있어요."

환경부에 따르면, 2010년 무등산에 오른 이는 모두 679만명. 같은 해 북한산 탐방객은 851만명이었다. 무등산 탐방객 규모는 국립공원 중 둘째로 많은 숫자이다. 무등산은 2015년 1000만명으로 예상한다. 무등산 정상 부근에 있는 입석·서석대(주상절리대)는 천연기념물 465호로 유네스코자연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기둥 모양의 돌들이 서 있는 무등산 주상절리대에 대해선 최남선이 '서석대는 마치 해금강의 한쪽을 산 위에 올려놓은 것 같다'고 했다.

"무등산 사랑은 애향·시민운동"

 박선홍씨는 무등산과 광주에 관한 자료를 평생 축적해왔다. 그는 “이젠 서서히 (자료의 수집과 정리, 보관에 대해) 정리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광주학(學)을 잇고 있는 후학들은 박 선생을 모시고 ‘광주 이야기’를 듣는 것을 최고의 행운이라고 여기고 있다. / 김영근 기자
―과거에도 국립공원 승격 운동이 있었는데요.

"2000년 무렵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등 시민단체 중심으로 운동을 펼쳤습니다. 당시 광주시가 암묵적으로 반대했어요. 당시 광주시 간부가 와서 그래요. '앞으로 하지 마세요. 중앙정부 권한으로 넘어가면 광주시가 할 일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국립공원이 되면) 무등산을 옆에다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데 뭐하러 그럽니까'라고요. 이제야 말하는데, 수모를 당한 거지요. 험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강운태 시장이 고마운 것이지요. 지방 장관이 서둘지 않으면 안 돼요. 앞장서서 된 것이지요. 군 시설이 있는 무등산 정상을 시민들에게 개방한 것도 강 시장입니다. 정말 시민들의 숙원을 푼 것이지요. 현역 시장이 무등산 정상을 간 것도 강 시장이 처음이에요. 예전 이런 일도 있었어요. 5·16 직후 자기도 모르게 목이 떨어진 광주시장이 전화를 했어요. '오늘 그만두게 됐어요. 무등산이나 갑시다' 하고."

―무등산보호단체협의가 펼친 시민운동에 힘입었겠지요?

"1989년 이 단체를 만들었고, 대표를 맡았지요. 산악단체와 민간단체들이 모인 거죠. '무등산을 보호하자'는 자각 운동이었습니다. '쓰레기를 버리지 말고 주워서 내려오자' '취사하지 말고, 도시락을 가져가자' '계곡에서 세제를 쓰지 말자' '웃으며 인사하자' '무등산을 아끼고 사랑하자'는 다섯 가지를 내걸었지요. 차츰 사회단체들이 참여하고 나중에는 시민운동으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취사 안 하기'는 모든 국·도립공원으로 확산되었어요."

―특히 1980년대 무등산 해맞이가 전국적으로 관심을 모았는데, 문제는 없었나요?

"섣달 그믐날 밤, '정월 초하루 해맞이한다'고 무등산을 올라요. 5·18 이후에 전국에서 광주로 모여듭니다. 광주YMCA에서 모여 대회를 하고, 해맞이하자며 무등산에 오릅니다(1980년 이후 시민들과 각지에서 광주를 찾아온 이들이 함께 등산했다. 정상 아래인 중머리재에서 수만 명이 모여 모닥불을 피우고 꽹과리를 치며 목이 터지게 외쳤다. 무등산에서 역사의 아픔을 위로받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1980년 이후 광주는 '빛고을'로 불리며 '청년 학도'들에게는 성지순례 코스로 여겨졌다). 우리가 5·18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은 좋지만, 무등산의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삼가자고 한 것이지요. 캠페인이 효과를 보았습니다. 1991년부터 해맞이 때의 산림 훼손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위대한 광주 정신의 발로가 아닐 수 없었지요."

무등산 정상권에는 군사시설이 있어서 1966년 이후 민간인들의 출입을 통제해왔다. 1990년 정상 아래 서석·입석대 주변이 개방되었다. 정상부 시설 이전 요구는 1990년대 중반부터였다.

―무등산 정상을 복원하자는 운동도 펼쳤는데요,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사실은 말을 못 했습니다. 군부와 관련이 있어서요. 간절했지만, 맞서 싸우는 것으로 생각돼서 정말 꺼내기 어려웠습니다(옆에 있던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정순택 공동의장이 보충 설명했다. 1995년 공식적으로 '군시설이 있는' 정상을 돌려달라 했다고 말했다. 바로 그 전에 군부대와 교감이 좀 있었고, 그때 정상에 있던 중요한 군사시설이 다른 데로 옮겨졌다는 것도 알게 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김영삼 정부 들어서서 누그러진 분위기도 한몫했다). 1996년 정상 아래에 있는 부대 건물은 없애고 억새가 자라도록 복원했어요. 아직 정상의 부대와 방송사 송수신탑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시민운동 차원에서 '무등산 공유화 운동'도 벌였어요. '무등산 땅 한 평 갖기'였지요. 이 운동은 영국 옥타비아 힐(1838 ~1912)이 1895년 일으킨 토지 신탁(national trust) 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습니다. 2001년 한국 최초의 토지 공유화 운동을 시작한 거지요. 무등산을 무분별하게 개발하거나 훼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기부받거나, 이를 사들일 수 있도록 기금을 모으는 것입니다. 성과를 거두었지요. 그리고 무등산사랑환경대학도 열어 시민들의 무등산 애호 정신을 일깨웠습니다."

저술로도 애향 운동

 박선홍씨가 펴낸 책자 ‘무등산’과 ‘광주1백년’
―등산활동뿐 아니라 '무등산'저술로도 기여하신 것으로 압니다만.

"광주상공회의소에 있을 때 외지인들이 오면 광주를 한번 돌아보자고 해요(그는 조선대 전문부 경제학과를 제1기로 수료하고 광주시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1949년 광주상공회의소로 옮겼다. 당시 상의 사무국장이 '시에서 상공 업무를 보았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1952년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자(당시 광주여객자동차 사장)가 광주상의 회장으로 부임, 평생의 연을 같이했다. 박씨는 1994년까지 광주상의에서 상근 부회장을 맡으며 '광주를 생산 도시로 만들자'는 목표를 갖고 활동해왔다). 그런데 무등산이 있지만 올라가기는 그렇고, 지실을 가면 참 좋아합니다(지실마을 일원은 무등산 아래에 있는 곳으로, 16세기 호남을 대표하는 사림 학인들과 시인 묵객들이 모여들어 가사 문화를 꽃피웠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원림 소쇄원이 있고, 정철이 성산별곡을 읊었던 식영정 등이 있다. 호남 각지에서 숱한 인물이 모여든 '호남 문화의 센터'였다). 손님 안내를 하려다 보니 처음엔 몇 페이지 프린트 안내서를 만들었어요. 끊임없이 자료를 모았지요. 곳곳을 직접 찾아가면서 자료를 모았습니다. 처음엔 무등산을 넘어서 지실을 가면 하룻밤을 자고 와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정도였지요. 그러다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했어요. 이렇게 하다 보니 7판(2008년)까지 한 것이지요('무등산' 책자는 1976년 출간, 증보를 거듭해왔다. 무등산의 유래와 전설·경관을 비롯해 문화, 역사, 개발 과정 등을 망라한다). 더러는 사 가기도 했지만, 대부분 제가 손님들에게 드렸지요. 돈벌이가 된 것은 아니었고."

―'무등산'이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요?

"초판 당시 산 하나를 가지고 종합적으로 낸 것은 별로 없었던 모양이오(지금까지 무등산에 관한 글이 대부분 이 책에 근거하고 있다. 이미 '고전'이 되었다). 제가 놀란 것이 '유서석록(遊瑞石錄)'입니다. 그렇게 상세할 수 없는 무등산 기행입니다. 임란 때 의병장으로 앞장서 두 아들과 함께 순사한 제봉(霽峯) 고경명(1533~1592)이 1574년 당시 '서석은 내 고향의 산'이라며 광주목사와 함께 5일간 무등산에 오르고 남긴 기록이지요. 참 위대한 분이시지요."

―'광주1백년'도 있지 않습니까.

"몇 가지를 적어보았어요. 모아지니 책이 됐어요. 어떤 선배가 글을 보더니 '이게 광주 역사다' 해요. '아이고 제가 역사를 배운 것도 아니고 잊어버릴 수 없어서 적은 겁니다' 했더니, 그 선배가 '광주1백년이라고 해라'고 해요. '아이고, 겁납니다' 했더니, 또 '사람이 통도 크고 그래야지 너무 위축되지 마라'고 해요. 그래서 대담하게 '광주1백년'이란 책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시골(전남 장흥)서 올라오셔서 광주 충장로에 자리를 잡으셨어요(그의 선친은 충장로5가에서 피복 도매상을 했다). 어쨌거나 저는 광주를 고맙게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살아왔고, 또 자식들 기르고 살았으니. 지금 개정판 작업하고 있습니다. 1권은 엊그제 출간했고, 2권 작업 중이에요. 책은 떨어지고 없고, '아직 움직일 수 있는 힘은 있는데' 하던 차였습니다. 광주문화재단에서 (개정판) 요청이 왔어요. 작년 문화재단에 '무등산'과 '광주1백년'에 관한 지식재산권을 기증했더니, 고맙다고 하더군요. 개정판 기회를 주니 저도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광주1백년'은 1994년 세상에 나왔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광주의 역사와 문화, 풍물과 세속, 상공업과 체육, 인물을 망라하였다. 그는 1987년부터 20년 동안 광주민학회를 이끌며 시민들과 문화유산을 답사하고 자라나는 세대에게도 지역의 문화를 전수하고자 힘썼다. 서울대 국문과 권영민 교수는 "박선홍의 광주에 대한 집착은 광주에 대한 신앙과도 같고, 광주학(光州學)이라고 할 정도의 학문적인 깊이와 전문성을 가졌다"고 평했다.

―광주 사랑이 참 대단하시군요. 그 출발이 등산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요. 6·25가 끝나고 1955년이었습니다. 광주·전남에서 처음 (전남)산악회를 조직한 거지요. 당시 한국산악회 지도를 받아 창립총회를 했어요. 그때 조선일보 주필이셨던 홍종인(1903~1998) 선생께서 산악회장을 맡아 이끄셨어요. 1년 뒤 홍 선생과 이숭녕(1908~1994) 서울대 교수 일행을 광주에 모셨고, 지리산에 올랐습니다. 산악 장비 전시회도 하고 강연회도 하면서 '산악 운동은 국토를 보존하고 애호하자는 운동'이라는 점을 알렸어요. 그때도 지리산에서 '(토벌)작전'이 있을 때여서 경찰관의 호위를 받으면서 올랐어요. 등반을 배우려고 한 것입니다. 노고단 야영 중 한밤중에 폭풍우가 몰아쳐 천은사로 내려왔다가, 주민 신고로 경찰 부대가 출동하는 사태도 벌어졌어요. 그때 회원들이 홍 선생을 깍듯하게 모시고 예의를 갖춰 등반하는 모습을 보고, '산악인의 정신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버너, 코펠, 닭털 침낭 등 등산 장비를 산에서 사용하는 것을 처음 보았어요."

―광주 사람들이 등산에 호응했습니까?

"1956년 첫 등산 대회를 열었습니다. '6·10만세 기념 무등산 등산 전국 대회'였어요. 대회 경험이 없어 진행 요령이나 규칙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시내 충장로1가에서 출발해 무등산 정상까지 달리는 것이었으니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어요. 2년 뒤 전남산악회와 전남대 산악부를 규합하여 무등산악회를 발족하고 '산악 운동을 펼치자'고 했어요. 발족하자마자 무등산 등산 안내 표지판 130여개를 만들어 세웠습니다. 첫 무등산 등산 코스 표지판이었지요. 회원들은 봄이면 무등산에 나무를 심었고, 등산로에다 코스모스씨를 뿌려 꽃길을 만들었습니다. '자연 앞에 겸허하자' '산을 아끼고 사랑하자'며 등산 대회를 계속 열어 시민들과 학생들이 참여토록 했습니다. 또 제가 보이스카우트 지도사로도 활동하면서 학생들에게 무등산 야영 생활을 통해서 애향심과 함께 자립심,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도록 했습니다. 산악회 활동과 보이스카우트 지도 활동은 밀접하지요."

―1950년대 무등산은 민둥산이 되었고, 도로도 막혔다고 하던데….

"제가 광주상의에서 일해왔지요. 박인천 상의 회장께서 습진으로 고생했는데 무등산 원효계곡에서 물을 사나흘 맞고 깨끗하게 나았어요. 그때 그래요. '무등산이 경치도 좋고 하니 전국에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개발도 하고 말이오.' 그래서 상의가 무등산 개발도 걸머졌습니다. 6·25 때 작전하면서 개설했던 군인 경찰 이동로이자 물자 수송로를 관광 도로로 내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어요. 광주시청에 건의했더니, '그런 돈은 없고 민간 자본으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해요. 그래서 박 회장께서 '그러면 내가 돈을 내고 주민들과 함께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지요. 그랬더니 무등산 주변 주민들이 '우리 평생소원'이라며 크게 반겼습니다."

―당부의 말씀도 있으실 듯합니다.

"무등산은 바로 광주입니다. 광주의 정신이 여기서 비롯됩니다. 무등산은 임진왜란 의병장 충장공(忠壯公) 김덕령(1568 ~1595) 장군이 활동했던 역사 공간이지요. 3·1 독립운동의 시발인 2·8 독립선언 운동의 주역이 광주 사람들입니다. 학생 독립운동도 그렇습니다. 10대의 소년들이 국권 회복을 위해서 싸운 예가 세계적으로 어디에 있습니까. 제2의 학생 독립운동이 1943~45년 광주에서 있었어요. 이게 기막힙니다. 학생이 넷이나 일본 형사들한테 맞아서 죽었어요. (광주 도심에 있었던) 경양방죽 물속에 처넣었습니다. 3·1운동 때에도 학생 독립운동 때에도 학생이 죽지 않았어요. 그런 면면한 정신이 5·18로도 이어졌습니다. 호연지기가 무등산에서 비롯된 것이지요(5·18 당시 시인 김준태는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란 시를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로 시작하며 광주의 아픔을 표출하였다). 이제 시민의 사랑을 바탕으로 그 무등산이 국립공원이 되었습니다. 풀이고 나무고 그곳에서 잘 자라도록 해야 해요. 과잉 시설을 하면 안 됩니다. 무등산을 더욱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는 광주학의 선구로 인정받아 2011년 조선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4~99년엔 조선대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장수·노화과학 연구의 권위자 박상철 전 서울대 의대 교수의 부친이다. 대한산악연맹 창설 50주년 때 '산악인 50'에 선정됐다. 여전히 박람강기(博覽强記)하는 르네상스적 인물로 시민의 존경과 신망을 받는 광주의 어른이다. 지금도 광주 도심 '금남로1가 1번지'에 있는 효성문화재단으로 매일 출퇴근하며, '광주1백년' 개정판 원고를 가다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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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푸키멀더